지리산 가을 단풍을 찾아 가다 (1편)
(노고단에서 세석평전까지)
몇 년 전 왕시루봉을 자주 오를 때의 일이다. 정상아래 안부 숲속에는 허물어져 가는 외국인 별장이 여남은 동 있었는데 그 중 A 텐트형 별장에 지리산 사진작가 임소혁씨가 임시 기거하고 있었다. 히말리야를 등반했던 전문 등산인이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사진작가로 거듭 난 사람이다. 사진전도 여러 번 열었고 사진집은 물론 책도 몇 권 펴냈으며, 지리산 사계를 산악잡지에 게재하여 지리산 사진작가로 널리 알려졌었다. |
그에게는 재미있는 특성이 하나 있었다. 사진을 찍으러 갈 때가 되면 체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며칠 동안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배불리 잘 먹으며 몸을 불렸다. 특히 겨울 설경 촬영을 할 때는 더 심해서 찾아오는 사람조차도 싫어할 정도였다. 어쩌다 들리면 차 한 잔 내밀어 놓고 한 마디 말도 아끼려는 듯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러기를 며칠, 마침내 준비가 끝나면 무거운 장비를 메고 집을 나서 며칠 뒤에야 돌아오곤 했다. 찍고자 하는 곳에서 며칠이고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다. 한 번 출사를 나가면 지리산이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 줄 때까지 보름 이상도 한 곳에서 머문다고 했다.
임소혁씨가 기거했던 A텐트 형 별장-박형이 이용했던 초록장이 바로 옆에 자리했다.
몇 년을 이렇게 왕시루봉에서 머물며 지리산 사진에 몰두하더니 곡성 봉두산 자락 폐교된 동계초등학교에 전시관을 열어 많은 사람들에게 지리산 사진을 감상하게 했었다.
(얼마 전 문을 닫고 중산리로 자리를 옮겼다. 지리산을 좋아했던 사람이 섬진강 문화학교를 열더니 중산리로 가서 지리산 문화학교를 열었단다) 그는 지리산의 표피적이거나 외형적인 면보다 웅장하고 장대한 내면의 참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인간 또한 내면의 참 모습을 알아내기 까지는 수많은 접촉과 교분과 인간적인 대화가 필요하듯 산 또한 그래야 하는 것이다. |
가끔 그의 사진첩을 들춰 볼 때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랫 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지리산을 숭모하고 지리산과 영혼을 함께 하며 그 넓은 가슴에 안겼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계절성과 시각에 따른 빛의 오묘한 조화를 감득하고 촬영 포인트에서 대상을 응시하며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연인처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지리산 또한 그의 뚝심과 인내심과 진실 됨에 감동을 받고 서야 가만히 제 모습을 내보여 주었을 것이다.
사진은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다. 가볍게 스치듯 눌러대는 우연성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자연과 사물의 아름다움만 찾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에 가려진 내면의 세계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낡고 스러져 가는 A텐트 별장을 찾으면 출사 전 화덕 앞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번 지리산 사진도 같은 맥락이다. 여러번 지리산을 찾았어도 지리산의 사진다운 사진 한 장 없었던 아쉬움이 언제고 마음을 무겁게 해 왔었다. 몇 년을 건강상 힘든 기간을 보내고 나니 체력 소모로 인해 감히 염두에 두지 못했던 지리산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몇 번 지리산을 들락거리다 지난 여름 처음으로 종주를 마치고 나서 자신감을 얻었다. 말 사면 경마 잡히고 싶다더니 마침내 지리산 가을을 담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른 새벽 하현달빛을 밟으며 지리산 능선을 탄 것이다.
노고재에서 바라본 반야봉-어둠 속에서도 부드러운 모성의 자태는 여전했다 (새벽 5시 20분 촬영)
어둠이 밀려가고 숲이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곱고 아름다운 단풍이 아니라 가뭄에 말라 오그라들고 비틀어져 구르는 낙엽뿐이었다. 노루목에 올라서자 아침햇살이 피아골 계곡을 향해 고도를 낮추며 서서히 세로금을 긋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기위해 성삼재에서 줄달음을 쳐 온 것이다. 빛이 보여 주는 색채의 향연을 잡기 위해서다. 지리능선의 사진이 아니라 계곡의 사진들이 이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다.
노루목에서 피아골 계곡의 이른 아침 햇살을 담고 동으로 향했다. 토끼봉을 넘어 연하천까지 해를 머리에 이고 가다 보니 낮은 각도의 햇살에 반사되는 나뭇잎들이 눈이 부시도록 화려했다. 벽소령을 지나, 해가 어깨를 스치며 등 뒤로 돌아서자 걷는 시간보다 뒤를 돌아봐야하는 시간이 많아 졌다. 지루할 만큼 천왕봉을 향하는 걸음걸이에 비례해서 해는 서쪽으로 점점 길이를 늘이고 있었다. 지리산 또한 쉽게 휘발해 버릴 것 같은 가벼움에서 서서히 무게를 담으며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
세석에서 짐을 풀고 이튿날 이른 아침 촛대봉에 올라서자 천왕봉 주능엔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어찌 밝고 화려하고 따뜻함만 가을 색채이겠는가? 어둡고 칙칙한 회청색 배경이 있어야 색채의 명시성이나 진정성이 더욱더 돋보이는 것이다. 하나의 자연과 하나의 태양과 그 것을 바라보는 한 인간의 감정이 서로 다양하게 교합되고 무수히 조합을 이루어야만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고 개념화 시키는 사람들에게 이런 오묘함과 다양한 변화성에서 오는 미적 충돌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예술이 다 그러하듯 사진 또한 언어적인 표현이 아닌, 자연과 사물을 정지된 시각으로 재현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사진은 자연 현상의 복합 요인을 촬영자가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과 미적인 교감과 감성을 통해서 얻어진 결과물이다. 이렇듯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찾아 나서는 적극성과 빛의 미묘한 흐름과 색채의 발현을 찾아내고 눈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 |
멀리 산등 너머로 얼굴만 보이는 천왕봉에서부터 제석봉 전망대에서까지 천왕봉 모습을 한 장이라도 더 갖겠노라며 사타를 눌러댔다. 오랜만에 보는, 아니 보여주는 옹골차고 웅장한 천왕봉이다. 그리곤 바위턱에 주저앉아 천왕봉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미어지도록 행복감에 젖었었다.
이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새벽길을 내 달려 온 것이다.
사진은 두 편으로 나누었으며
1편은 노고단에서 세석평전까지
2편은 세석에서 천왕봉을 넘어 로타리산장까지로 구분했다.
2008. 10. 20 Forman (정홍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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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으시는 곡은 Giovanni Marradi -Bells Of San Sebastian (가을의 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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