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지식인 황윤석과 지방의식
배우성(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백과사전에서 역사인물을 찾아보자. 먼저 그 인물의 본관이나 자, 호, 관직생활과 문집 등에 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간혹 그가 나고 자란 곳, 묻힌 곳에 관한 정보가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가 지방 사람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를 알 수는 없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가 전혀 ‘지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지방과 지방출신 학자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부분 ‘지방화된 전국사’일 뿐이었다. 지방화와 세계화가 화두인 지금, 지방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들의 삶과 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해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고창 출신의 지식인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지방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인물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박학다식의 학문경향을 가졌던 그는 늘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했다. 그러나 궁벽한 시골 출신의 욕구는 쉽사리 충족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관직을 원했지만 그 소망도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커져버린 현실, 지방민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현실을 살아야 했다. 그의 사상은 이런 현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되었다.
지방에 대한 편견과 황윤석의 대응
황윤석은 김원행(金元行)에게 배웠으므로 자연스럽게 노론 낙론계(洛論系)의 학맥과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안에 따라서는 지방 사회의 자율성과 지방 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중시하였다. 1765년(영조 41) 송명흠이 영조의 비위를 거슬러 고향으로 쫓겨났다. 얼마 뒤 송명흠을 따르는 호남 유생들이 상소를 준비하다가 송명흠의 만류를 받고 그만 둔 일이 있었다. 황윤석은 이미 발의된 상소를 중도에 포기한 행위야말로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송명흠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지방 유림들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발의된 상소라면 그대로 관철되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스승 김원행이 황윤석에게 말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소식을 들어보니 그대의 아버지는 공부가 독실하다 하는데, 그대에 대해서는 이런 평가가 없으니, 근심이다.” 황윤석이 대답했다. “시골 선비들은 서울의 벌열가문 출신 선비들에 비길 바가 아니니, 그들이 과거 시험에 공명심을 낸다 한들 모두 이익을 좇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버님이 제게 의리 공부를 권하고는 계시지만, 노부모를 봉양하는 가난한 시골 선비로서 과거를 포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황윤석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박학다식한 선비로 여겼다. 그러나 그런 그도 과거시험과는 끝내 인연이 닿지 않았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학파나 정파의 인연도 중요했다. 하지만 서울 출신이라면 더 유리했다. 황윤석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순히 지방출신이라는 사실도 문제지만, 그 지방 학풍에 대한 외부의 편견도 문제였다. 황윤석은 지방 출신 인사를 배제하는 세태를 바로잡기 위해서 호남 지방 학풍의 상징적인 인물인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스승 김원행이었다. 황윤석은 김원행의 조카인 김이신의 힘을 빌려 이 문제를 호남의 문제가 아니라 학통과 학연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했다.
지방 지식인, 새로운 정보에서도 소외
지방 지식인들은 관직에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보에서도 배제되었다. 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정보들은 지방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서울 지식인 사회에도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 학연이나 신분, 정치의식의 차이를 과거처럼 절대적인 장벽으로 여기지는 않게 된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황윤석은 서호수(徐浩修)의 집을 찾았다. 서호수는 당시의 젊은 선비들 가운데 서양과학에 가장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서호수의 박학다식함을 직접 확인한 황윤석의 감상은 이 한마디에 녹아 있다. “사람은 서울에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겠다. 궁벽한 곳에 태어나게 되면 비록 영민한 재질을 가졌더라도 어찌 바로 지름길을 찾을 수 있겠는가.”
서울에 살던 북학파 지식인들은 서양과학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뿐만 아니라 북학의 정당성과 청 문물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대부분 사행(使行)을 통해 번영하는 북경의 현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청이 ‘어떻게’ 그 중화문화를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심했다.
황윤석도 서호수처럼 서양과학을 옹호했다. 그러나 황윤석의 논리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그는 명이 받아들인 서양과학의 성과를 청이 ‘강탈’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으로부터 서양과학 서적을 들여와 참고하는 현실을 합리화하면서도, 벽돌이나 수레같은 청대의 문물제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심했다. 황윤석의 눈에 벽돌이나 수레는 중국 고대 성인이 말한 바 없을 뿐만 아니라 명대에까지 그 기원을 연장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벽돌과 수레야말로 북경의 도시적 번영을 상징하는 키워드이며, 서울의 북학파 지식인들은 그것을 도입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황윤석의 논리에는 지방 지식인으로서의 경험과 문제의식이 짙게 묻어난다.
글쓴이 / 배우성
·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저서 :『조선후기 국토관과천하관의 변화』, 일지사, 1998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공저), 효형출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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