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시정부와 백범의 독립운동 ]
글쓴이 윤 병석 (인하대 한국사)
대한제국 시기에 정열적으로 구국계몽활동을 벌이다가 세 차례나 투옥되어 10년 동안이나 잔인한 고문과 인천 부두 축조공사 등의 고된 노역에 시달렸던 백범김구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서둘러 망명 길에 올랐다. 백범은 안동(安東)을 거쳐 독립운동을 돕던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선박 편으로 그 해 4월 13일 상해에 당도하였다. 그 날이 마침 3.1운동의 결정(結晶)으로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포 일이었다. 백범은 바로 애국계몽운동 시절의 선배이며 임시 의정원 의장인 이동녕(李東寧)을 찾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1945년 11월 임정 정부의 주석으로 임정 요인을 이끌고 환국할 때까지 전후 27년 동안 임시정부의 보위, 발전(保衛 發展)과 국내 ·외 독립운동을 영도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름 구(龜)를 구(九)로 고치고 백범이라 자호(自號)하였던 김구는 안창호(安昌浩)를 통하여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원하였다. 초창기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안창호는 국무회의 결의를 거쳐 백범을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5년 남짓 그 자리에 재임한 백범은 당시 다망다난(多忙多難)하던 임시정부 요인의 안녕과 임시정부 수호의 중임(重任)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백범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양하였다. 이동녕과 안창호는 물론 초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그를 이은 제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 연해주에서 부임한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 국치이래 상해에서 독립운동 기반을 닦은 신규식(申圭植) 등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을 모시고 임시정부의 보위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20여명의 정복 또는 변복(變服)의 경호원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일제측의 파괴공작과 임정요인 위해 공작으로 백범은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임정요인의 변절이탈과 친일파의 암중 활동까지 경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경무국장이 심문관, 검사, 판사로 (죄인의 사형 등) 집행(執行)까지 하게 된다"는 백범 자신의 술회와 같이 임시정부의 경찰 사법권을 전담하다시피 해야만 하였다.
백범은 임시정부가 그래도 활기찼던 초창기를 지나 안팎으로 존립의 위험이 닥칠 무렵 내무총장에 선임되었다. 침체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코자, 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국내외 대표가, 그것도 제제창명한 인사들이 모두 상해에 모여, 신망있던 안창호와 김동삼(金東三) 등이 차례로 의장이 되어 개최하였던 국민대표회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놓고 개조파(改造派)와 창조파(創造派)로 분열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백범은 여기서 중대결정을 내렸다. 내무총장의 직권으로 그 회의를 해산시켜 비등하던 정국을 안정시켰던 것이다.
국민대표회의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끊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국내외 독립운동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으로 판단하였던 까닭이다. 창조파들만이 모여 만들었던 김규식을 주석으로 한 조선공화국정부도 자괴하고, 결국 임시정부는 그 법통을 지킬 수 있었다.
또한 백범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면직과 2대 대통령 박은식의 사임 등 정국 변동으로 만주에서 온 이상룡(李相龍)과 진강(鎭江)에서 온 홍진(洪震) 등이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국무령(國務領)으로 선임되었지만 조각(組閣)도 못 한 채 무정부 상태에 빠졌을 때, 이동녕의 천거로 국무령에 선임되어 윤기섭, 오영선, 김철. 이츄홍 등을 규합하여 조각에 성공함으로써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으면서 국무령제로 고치고 윤번 주석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보다 시련이 가중되면서, 임시정부는 단돈 30원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청사 조금(租金)이나 20원 미만이던 불가결 용인(庸人)의 월급도 지불하기 어려운 곤경에 빠져 그 활동이 극히 위축되었다.
겉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일제가 속으로는 혹독한 파괴공작을 펴게 됨으로써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던 연통제(聯通制)가 거의 발각, 와해되었고, 아울러 국내외를 연결하던 교통국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일제의 마수에 걸려드는 독립운동의 동지들이 점차 증가하여 그들에게 투항하거나 혹은 피체되어 본국으로 압송 송환되는 사례가 늘어갔다. 예컨대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鄭仁果), 독립신문사 사장 이광수(李光洙), 군무부 차장 김의선(金義善) 등이 연이어 일제에 투항 변절하는 판이었다. 더욱이 1930년을 전후해서는 일제는 대륙침략을 가속화시켜 만보산 사건(萬寶山 事件) 등 한·중간에 이간책을 쓰면서 관동군(關東軍)을 동원, 9 ·28만주사변을 일으켜 남·북 만주를 강점하고 1932년에는 만주국(滿洲國)을 세워 그들의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중요 해외기지가 무너져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은 난국에 직면하자, 백범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통하여 난국에 대처하고 임시정부의 새 활로를 찾았다. 첫째는 '편지정책'을 통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고 활동자금을 지원받았다. 뿐만 아니라, 미·중 한인사회가 연대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게 한 것이다. 백범은 이를 위하여 이미 임시정부에서 퇴임당한 이승만에게 '호형(呼兄)'하면서 그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재임명하여 구미외교를 강화시켜 갔다.
또한 미주와 하와이 한인 사회의 유지들인 김경(金慶), 안창호, 현순(玄楯), 김상호(金商浩) 이홍기(李鴻基), 임성우(林成雨), 김평(金平), 홍언(洪焉), 송종익(宋鐘溺) 등은 물론 멕시코, 쿠바의 김기창, 이종오, 인천택, 박창운 등에게도 임시정부의 어려운 형편과 조국 광복의 경륜을 홍보하여 그들에게 임시정부 지지와 독립운동 자금의 출연(出捐)을 유도함으로써 적지않은 송금이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답지하게 되었다.
둘째는 백범이 임시정부 재무장(財務長)의 자격으로 임시정부의 예산의 절반가량을 투자한, 과감한 특무공작을 펴 세기적인 거사인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결행하게 하였다. 백범은 1931년초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임시정부의 운명을 가늠하는 특수공작의 전권을 위임받고 극비로 열혈 구국청년을 모아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치밀한 준비를 갖추어 1931년 1월에 일왕 폭사 응징을 위한 이봉창의 동경의거(東京義擧)와 그해 4월에 윤봉길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를 차례로 거사함으로써 한중 양국 인민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후 이 거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새 국면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백범은 홍구공원 의거와 관련하여 1933년 5월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莊介石)을 만나 한·중 항일의 유대를 강화하고 낙양중앙군관학교(洛陽中央軍官學校)에 한인군관반(韓人軍官班)을 두어 장래(將來) 독립운동을 지휘할 한인 청년 군관 양성을 시작하였다. 만주 독립군의 영장들인 지청천(池靑天), 이범석(李範奭), 오광선(吳光鮮), 김창환(金昌煥) 등을 교관으로 보내어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온 독립군 전사와 관내 북경(北京), 천진(天津), 상해(上海), 남경(南京) 등지에서 증모한 청년 100여명이 제1차로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일제는 홍구공원 의거 직후 백범의 몸값을 30만원에서 60만원으로 올리는 등 백범 체포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일시 비취 목사 댁에 몸을 숨겨 있던 백범은 가흥(嘉興) 피신을 시작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이와 전후하여 임시정부도 상해를 떠나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진강,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을 거쳐 1940년에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같이 중경에 도착, 전시체제로 재정비되었다. 임시정부가 이와 같은 전시 중 장정(長征)하던 동안에 백범이 벌인 여러 활동 중에서도 감격적인 일은 스스로 '대가족' 이라 칭하던 100여명이 넘는,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의 안전 수송과 생계대책에 대한 헌신이었다. 온갖 방책을 다 동원하여 중국 정부의 후원을 얻어내는 한편. 가족들의 상호 협조와 자활을 유도하여 마침내 중경에까지 무사히 옮겨놓고, 토교(土橋) 봉취지역에 한 지단까지 마련하여 집을 짓고 그들을 안주케 한 일이다. '대가족'에 대한 정성은, 상해 탈출시 미처 연락이 되지 못해 낙오되었던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를 모셔오고자 두 번이나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때 거금을 들여 파견하였던 안공근에게 "혁명가가 피난하면서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유기(遺棄)함은 군(君)의 가도(家道)는 물론이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불인한 사(事)"라고 크게 질책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또한 백범은 이 파천 중 많은 '가족'을 잃었다.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이며 그가 가장 경모하던 이동녕이 71세로 진강(鎭江)에서 작고, 그곳에 안장하였고, 중경 당도 직후에는 그의 모친 곽대부인(郭大夫人)이 하세하였다. 백범은 망명초 국무총리 이동휘를 만나 공산주의 이념과 노선의 수용을 권유받았으나 그를 거절하였다. 그후 세차게 밀어닥친, 새로 풍미하던 여러 이념과 사상의 갈등 속에서도 끝내 그는 지론인 민족주의 이념을 견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활동은 민족주의 구현의 테두리 속에서 공산, 사회주의 및 그밖의 무정부주의자들과 합작과 협동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를 위하여 상해 시절에는 이동녕,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차이석(車利錫), 송병조(宋秉祚), 김봉준 등과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조선혁명당 및 한국독립당과의 3당 통합논의를 벌였고, 1920연대 후반기에는 다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에도 그는 한국독립당을 이끌고 의열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미주독립당 등과 5당의 통합운동에 가담하였다. 1940년대 중경 시절에는 다시 좌우 합작운동이 전개되어 5당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국무위원과 윤회 주석제를 폐지하고 임시정부를 내외에 대표하는 주석과 그를 보좌하는 부주석제를 채택하여 백범이 주석에, 그리고 김규식이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나아가 이시영, 조성환, 황학수, 조완구, 차이석, 장건상, 박찬익, 조소앙, 함주식, 김붕준, 유림, 김원봉, 김성숙, 조경한 등 좌우를 망라한 14인으로 강력한 국무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백범은 이와 같이 임시정부를 강화하면서 연래의 숙원인 한국광복군을 창설, 지청천을 총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 그리고 황학수를 서안(西安)의 전방사령관에 선임, 항전을 시작하였다. 처음 30여명의 인원으로 미주 교포의 성금을 바탕으로 발족한 한국광복군은 김원봉(金元鳳)이 지휘하던 조선 의용대까지 통합하면서 병력을 증강, 1945년 8월 해방전후에는 700여명 내외의 임시정부 국군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광복군은 OSS훈련이라 칭하는 미군과의 합작 특수공작 훈련도 받았고,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2차대전에 참전, 본토 수복을 위한 국내 정진작전(挺進作戰)을 준비하던 중 일제의 패망과 조국 해방의 소식을 들었다.
한편, 백범 주도하의 임시정부는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마련, 임시의정원의 심의를 거쳐 확정 공포하였다. 이 건국강령은 임시정부의 정치 이념과 건국방략을 결집한 것으로, 임시정부는 이 강령에 따라 전시체제를 확립하면서 광복군을 통한 대일 항전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임시정부는 조국해방을 목전에 두고서 광복방략과 경륜을 보다 체계화하면서 복국(復國)과 광복에 대한 비전과 규범을 제시하려 하였다.
백범이하 임시정부 요인은 그 해 11월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중국 군용기 편으로 꿈에도 그리던 조국을 향하여 중경을 이륙하였다. 이 환국의 비햄은 바로 임시정부의 금의환국(錦衣還國)이었으나 상해에서 미국기로 옮겨 타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은 무시되고, 임정 요인들은 조국을 잃었던 망명객의 개인 자격 환국이라 지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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