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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38세이던 다산은 황해도의 곡산(谷山)고을에서 원님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에 독감이 크게 유행하여 죽어간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나라에서 부자들로 하여금 구호하고 치료하며 매장토록 하여 그렇게 한 부자에게는 3품이나 2품의 품계에 해당한 직첩을 내린다는 윤음(綸音 : 임금의 말씀)이 고을에 내려왔습니다. 다산은 그런 사실을 고을에 알려서 몇 사람의 부자들이 그에 응했습니다.
그때 5명의 부자가 정부에서 시키는 일에 참여하자, 다산은 황해도 감사에게 올려 나라에 전달되도록 했습니다. 감사가, “다른 고을에는 받들어 실행한 사람이 없으니 한 고을 백성만을 유독 임금께 올려 바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다산의 건의를 묵살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산은 즉시 승정원(承政院)에 보고를 올려 사실대로 알렸답니다. “이제부터는 임금님의 지시사항도 백성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 마땅히 곧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아뢰어야 옳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상경하여 상소로 올리겠다”고 주장하자, 승정원에서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크게 놀라 황해도 감사에게 2등급의 감봉조치를 내리고 5명의 부자 백성에게는 모두 품계의 직첩을 내렸다고 합니다.(목민심서, 관질(寬疾)조항)
곧고 바른, 옳은 일에는 굽힐 줄 모르던 목민관 다산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나랏님이 반포한 정당한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는 감사에게 당당하게 대항하여 잘못을 시정하고 처벌까지 받도록 했던 직신(直臣)이던 다산. 그러한 자신의 실천적인 행정행위가 있었기에, 『목민심서』라는 목민관들의 바이블이 되는 저서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국민과의 약속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지켜야만 한다는 다산의 준법의식은 정말로 투철했습니다. 임금의 윤음은 나라의 법인데, 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이 바르게 돌아갈까요. 높은 지위의 정치인일수록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않고 식언(食言)만을 반복하는 요즘, 다산의 목민관으로서의 자세야말로 오늘 공직자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목민관이었기에 1801년 다산을 죽이려 했을 때, 황해도 감사를 지낸 정일환(鄭日煥)이라는 분은 곡산에 공이 큰 다산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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