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실학산책] 15세기의 건축가, 박자청 / 김문식

문근영 2010. 4. 15. 10:36

15세기의 건축가, 박자청


김 문 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박자청(朴子靑, 1357~1423)은 고려말 황희석의 하인에서 시작하여 1품직 고관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황희석은 시중 황유중의 후손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박자청이 태조 이성계에게 발탁될 때의 일화이다. 1393년(태조 2)에 중랑장 박자청은 당번이 되어 궁궐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이 궁궐 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박자청은 국왕의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화가 난 의안대군이 발길로 걷어차 얼굴에 상처가 생겼지만 박자청은 요지부동이었다. 이 일을 들은 태조는 의안대군을 나무라고 박자청을 국왕 경호를 담당하는 호군(護軍)으로 발탁했다. 이후 박자청은 무반 관리로 출세가도를 달렸는데, 우직할 정도로 충성심을 보인 그를 태조와 태종이 신뢰했기 때문이다.


서울 건설, 정도전이 기획하고 박자청이 만들고


박자청은 건축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1412년(태종 12) 태종의 발언에는 그가 지은 건물들이 나타난다. “사람들이 박자청을 미워하는 것은 토목의 역사(役事) 때문이다. 송도의 경덕궁과 신도(서울)의 창덕궁은 내가 거처하는 곳이고, 모화루와 경회루는 외국 사신을 위한 곳이다. 개경사와 연경사는 부모님을 위한 곳이고, 성균관을 짓고 행랑을 세우는 것은 국가를 위해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역사를 다른 재상에게 감독하게 했더라면 명령을 따르지 않았겠는가?” 여기서 개성사와 연경사는 태조의 건원릉과 신의왕후의 제릉에 세워진 재실이자 사찰을 말한다.


박자청이 담당한 건축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경복궁 남쪽에서 종묘까지 이어지는 행랑을 건설했고, 동대문 밖에 마장(馬場)을 조성했으며, 수강궁, 태평관의 어실(御室), 살꽂이 다리, 풍양의 이궁(離宮), 연희궁을 건설했다. 정도전을 조선시대 서울의 모습을 기획한 설계자라고 한다면, 박자청은 서울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 낸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박자청의 자질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1412년 경회루의 연못을 팠는데 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가득차지가 않았다. 박자청이 계책을 올렸다. 물을 빼낸 다음에 물이 스며든 곳을 검은 진흙으로 메우면 물이 고이게 할 수 있다는 방안이었다. 시험 결과 박자청의 판단이 옳았다. 1420년 원경왕후가 사망하자, 박자청은 마전(麻田)의 나루터에 부교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완강히 반대가 있었지만 부교는 만들어졌고, 국장 행렬은 평지 길을 밟듯이 무사히 강을 건넜다. 뒤늦게 칭찬이 쏟아졌다.


미움도 샀지만, 일을 알고 부지런한 인물


박자청은 공사가 시작되면 무서울 정도로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1407년(태종 7)에 그는 성균관 문묘를 건설했는데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인부들을 독려하여 불과 넉 달 만에 건물을 완성했다. 이를 본 변계량은 새로 건설된 문묘가 높고 그윽하며 단정한 것이 개성의 문묘보다 낫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밤낮으로 혹독하게 공사를 진행하다 보면 민폐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다음은 사관의 기록인데 그의 단점을 적시한 것이다. “박자청은 성품이 가혹하고 각박하여 어질게 용서하는 일이 없었다. 미천한 데서 일어나 다른 기능은 없고 토목 공사를 감독한 공으로 지위가 재부(宰府)에 올랐다.” 실제로 공사에 하자가 생기거나 인명에 손실이 오면 박자청을 처벌하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그러나 태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는데, “박자청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부지런하고 곧기만 하다”는 것이 태종의 평가였다.


박자청의 마지막 공사는 태종의 헌릉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1422년(세종 4) 산릉도감의 제조를 맡은 박자청은 공사를 위해 인부 1만 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기근이 심한 시기라 경기도 일원에서 2천 명만 동원하고, 나머지 일은 소를 동원하여 충당했다. 박자청은 자신을 끝까지 믿어준 태종의 산릉을 조성하는데 마지막 힘을 쏟았고, 그 이듬해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박자청이 사망하자 세종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그를 위한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했다.


박자청은 조선 왕실의 인정을 받으면서 최고위직에 올랐던 평민 출신의 건축가였다.

 


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