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법정 스님 다비식을 다녀오며

문근영 2010. 3. 31. 07:03
법정 스님 다비식을 다녀오며
    예상대로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있는 송광사 입구는 차량의 행렬로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승용차와 
    인파가 엉기며 길은 혼잡했지만, 12시가 조금 지나 다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스님이 누워 계셨을 
    대나무 평상은 이미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불길에 쌓여 있었다. 거침없이 타 오르는 불길 
    속에 법정 스님이 누워 계실 것이다. “ 스님, 불 들어 갑니다. 나오실라면 나오시오.” 이것이 관 (법정 
    스님의 경우는 대나무 평상 위겠지만)에 불을 댕기기 전 외치는 절집의 예식이란다. 
                “시끄럽다. 어서 불이나 지펴라.”라고 말씀 하시고 싶으셨겠지.
    삶과 죽음이란 거창한 논제를 풀어 놓지 않는다 해도, 떠남의 자리는 항상 가슴을 애리게 한다. 
    산 자의 가장 견디기 힘든 아픔, 그것은 이미 가버린 사람이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그리워 질 때, 이젠
     더 이상 아무것도 무엇인가를 그를 위해 할 수 없을때. 그 통한의 아픔이 가눌 수 없어 죽음 앞에 무너
    져 내리는 것은 아닐까. 
    한 시대의 문필가로, 위대한 수도승으로, 많은 이들에게 정신의 양식을 주었고, 삶의 위로를 주셨던 분. 
    계심으로 청정한 대나무 바람을 일게 하실 수 있던 분. 그 분의 입적 뉴스는 (속가의 나이 78세, 법랍 55세) 
    서늘한 바람이 허공을 가르는 가슴시린 순간이었다. 멀기만 하던 부처님 말씀을 중생들에게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게 해 주셨던 소통의 글들, 절제되고, 단정한 문체로 반듯한 삶을 바라보는 삶의 지표를 
    갖게 해 주셨던 분. 그래서 멀리 계셔도, 단 한 번의 스쳐 바라볼 기회가 없음에도 그저 항상 그 자리에 
    여여하시리라 고마우셨던 분. 타오르는 불길, 한번씩 튀어 오르는 불똥, 어쩌다 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연기, 
    빈 허물같은 육신의 고통은 이렇게 끝이 나고 마는 것인가. 
    
    여기저기 여인네들이 앉아 독경을 읊조린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사람들. 합장하며 불길을 향하여 예를 갖추는 사람들, “예루살렘의 딸들이여, 나 때문에 울지 말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식들 때문에 우시오.” 라며 울고 있는 여인들을 위로했던 십자가 울러 멘 예수의 말씀이 스치듯 귓가에 살아남은 무엇일까?
    장례는 간소히 하라던 법정스님의 유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가사 걸친 스님들의 경건한 행렬을 그려봤던 내게, 왠지 스님께 예가 아닌 것 같아 괜스레 서운하다. 영정 든 앳된 소년 같은 스님의 애절한 표정과 눈물이 없었다면, 그 서운함이 대상없는 야속함으로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불일암 오르는 길 댓잎이 싱싱하게 봄물이 오르고 있다. 비가 예보됐던 것과는 달리, 날씨는 화사한 봄날, 하늘이 큰 부조를 스님께 올렸던가 싶다.주인을 기다리는 작은 빈 의자, 댓돌위의 하얀 고무신. 암자 뒤편에 스님이 손수 만드셨다는 투박한 작은 의자와 장작더미, 그 어느 것도 스님의 가심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암자의 작은 법당 안, 법정 스님의 영정이 참배객들을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다면.
    암자 옆, 암자를 지은 대목의 아들이 심어 놨다던 매화엔 이제사 겨우 꽃망울 몇 개 맺어있다. 스님 생전에 그다지도 아끼며 바라보셨다던 꽃. 아름다움에 대한 욕심을 놓기는 어렵다던 스님, 불일암 이곳저곳에 스님의 손길로 심어 놓은 꽃나무들이 봄볕을 받아 손톱만큼씩은 솟아 오르겠다. 수선화도 치자 꽃도 머지않아 꽃망울을 터치겠지.
    불일암 마당은 다비식 참관후 올라온 조문객들로 술렁이고, 스님을 기억하는 작은 스님들의 법정스님에 얽힌 이런저런 일화들을 말씀 하신다. 노래로 조문의 보시를 하는 순박한 보살님의 청아한 목소리에 슬픔보다는 잔잔한 고요와 평화가 일렁인다. 이런 도란거림의 고요, 아마 법정스님이 편안한 눈길로 바라보실 수 있었겠다. 먼 산의 능선이 부드러운 그림을 그리고, 해우소로 작은 공부방으로 스님의 대나무 얽혀 만들어 놓은 목욕간으로, 작은 샘터로, 봄볕이 부서져 황금빛 가루처럼 빛난다. 스님의 고요와 무소유와 버림의 공간, 그 자유로움이 지금 이 곳에서 내게로 다가온다.
    강원도 산골 오두막, 깊은 새벽 고통스런 기침으로 깨어나 앉아야 하는 육신의 그 고통에서 스님, 이제는 편안히 잠드십시오.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저 먼 서양의 수도자들의 얘깁니다. 침묵 속에 기도하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수도 자들, 아름다운 영화였습니다. 화면도 더 할 수 없이 아름답고, 침묵 속에 울리는 알프스 산자락의 바람소리, 쏟아져 내리는 계곡의 물소리, 내리는 빗소리, 나뭇잎 몸 부딪치며 내는 소리, 그럼에도 영화 내내 가슴이 누군가가 짓 누르는 듯이 답답 했었습니다. 기도하는 수도승들의 수단 자락과 그들의 눈길을 바라보며 자꾸만 울 고 싶어졌습니다. 순간순간 ‘저는요 주님, 그냥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살께요.’라고 중얼 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누구의 인생에 대해 감히 점수를 매길 수 있을까요? 항상 자기의 그릇만큼, 자 신의 잣대 만큼 말하고 싶어합니다. 스님의 그 꼿꼿함과 그 맑음을 위해 지켜야했던 그 시간들이 내 그릇으로 본다면 너무 아파보여서, 너무 애잔해서 한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스님, 내 생엔 이것저것 다 내려놓으시고 훨훨 자유로운 영혼으로 오십시오. 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 하시고, 잡숫고 싶으면 그리 하시고, 가고 싶으면 가신다 하 시고, 미우면 밉다, 예쁘면 예쁘다 하시고.“
    영정 앞에 합장하며 “스님, 미망의 중생이 그만 하지 않아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생각으로 떠들다 갑 니다. 극락왕생 하십시오.” 불일암 아래 작은 암자(서전), 스님을 찾는 방문객을 피해 수도 정진 하셨다는 곳을 잠시 둘러
    보고 하산을 한다. 아직도 해는 중천. 대 숲의 나뭇잎 부딪는 소리, 작은 새들의 재잘거림, 졸졸 흐르는 산 속의 작은 물흐름 소리, 불일암 오르 내리는 길이 내게 또다른 그리움의 길로 깊이 각인이 되어 예정에도 없이 찾고 싶은 길이 될 것 같다. 아주 가끔 내가 휘어져 휘청거리고 있을 때, 스님의 그 꼿꼿함이 그리워질 때. 그만 세상이 어지러워 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