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의 모에 서점과 간다의 고서점
심 경 호(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1.
영화 『졸업(The Graduate)』(1967년)을 보면, 사이먼 앤드 가펑클(Simon & Garfunkel)의 음악 「스카브로의 추억」을 배경으로, 벤 브래덕(더스틴 호프만)이 엘레인(캐서린 로스 분)을 찾아 버클리 대학과 캠퍼스 타운을 돌아다니는 장면이 있다. 나는 1970년대 중반에 AFKN에서 그 영화를 흑백 화면으로 보면서, 벤이 앉아 있는 커피 하우스 건너편 버스 정류장 뒤 건물에 붙어 있는‘Moe’라는 글씨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 했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이 앵글 속에 그 간판을 잡아 둔 것은 무언가 의미가 있을 듯했기 때문이다.
2007년 2월에 버클리로 한적을 조사하러 갔을 때 보니, 벤이 앉아 있었던 거리는 텔리그라프 애비뉴(Telegraph Avenue)였다. 길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고, 엘레인이 올라탔던 버스는 운행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버스가 없었지만 영화의 장면을 그렇게 설정한 것인지 모르겠다. 'Moe'라는 간판은 그대로 있었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고서점의 간판이었다. 그런데 영화감독이 그 간판을 앵글 속에 잡아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버클리 대학가의 랜드마크는 바로 이 모에 서점이었기 때문이다.
버클리 대학은 주립대학교인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열 개 캠퍼스 중 가장 먼저 1868년에 창립되었다. 그런데 2006년까지 모두 61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이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거나 연구한 경험이 있으며, 그 중 20명이 이 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거나 역임하고 있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핵폭탄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1960년대 자유언론운동과 반전 운동 및 히피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센터가 있어서 한국의 교수들이 상당히 많이 방문하기 때문에 우리와 매우 친숙한 대학이다.
이 버클리 대학가의 북쪽 새덕(Shattuck)에, 1959년에 모에 모스코비츠와 그의 부인 바바라는 작은 서점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1960년대 초에 텔리그라프 애비뉴로 점포를 확장했다. 거리에서는 베트남전 반대의 학생운동이 한창이었고, 그들을 비호한다고 시 당국이 탄압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서점을 닫지 않았다. 또 모에 모스코비츠는 헌책을 파운드 단위로 팔던 관습을 혁신해서 고서에 정당한 가격을 매기기 시작했다.
지하 1층과 지상 4층의 건물이었던 것 같다. 모두 20만권이나 된다는 고서가 주제별로 분류되어 있어서, 판본이 다른 책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 머물 수는 없었지만 점심시간이면 모에에 들렀다. 행복했다. 조나단 리뎀이라는 소설가도 이 서점의 스태프였다고 하니, 좋은 고서점은 작가에게 창작의 영혼을 일깨워주는가 보다. 헤르만 헤세도 고서점의 점원이었다고 한 말이 문득 기억났다.
2.
올해 1월 29일부터 사흘간 메이지 대학에서 강연을 부탁하기에 도쿄에 갔다 왔다. 지금까지는 도쿄에 가더라도 학회의 일정이 빡빡해서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한 시간의 강연만 하면 되었으므로 비교적 한가했다. 게다가 메이지 대학은 간다(神田) 진보초(神保町)의 고서점가 끝에 있었으므로, 종일 고서점가를 돌아다녔다. 20년 전에 처음 들렀을 때보다 더 정돈되어 그런지 처음에는 고서점이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도쿄 고서적상업협동조합 간다 지부가 제작한 『간다 진보쵸 고서점명부』에 의하면 이곳에는 여전히 고서점이 159개요, 신간서점도 35개나 된다고 한다.
모에 서점이 먼저였는지, 일본 서점이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일본의 고서점도 책마다 가격을 매겨 두었다. 일반고서는 신간보다는 싼 가격을, 절판은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을, 흠이 있는 책은 훨씬 싼 가격을 책정해 두었다. 작은 팜플렛 하나, 문고본 하나라도 모두 그런 식이다. 다만 일본에서는 1919년 8월, 도쿄 도서구락부가 간다에 신축되고, 그 이듬해 정월, 도쿄 고서적상 조합원 400명이 모인 제1회 조합 총회가 개최되었다. 도쿄 고서적상업협동조합이 설립된 것은 1947년 9월 11일이라고 한다. 전쟁 후 안정을 찾아가던 시기였으므로 그때부터 간다에 고서점들이 리본 형태로 늘어서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고서의 가격을 매기는 방식이 당시에 벌써 확립되어 있었을 듯하다.
지금은 일본 전국뿐만 아니라 한국 등 외국 어디에서나 책을 주문할 수 있다. 하지만 고서점마다 전문 분야의 고서들을 모아 두고 있으므로, 어떤 주제의 관련 서적들을 한꺼번에 보고 싶다면 고서점가로 가는 것이 좋다. 이번 걸음에서는 ‘이 나이에’ 하는 생각에 구경만 하러 들어갔다가, ‘이 책을 읽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는 생각에 꽤 사들고 나오고는 했다.
고지도와 고판본만 전문적으로 파는 서점에서 낯익은 책을 발견하여 꺼내들었더니, 6000엔의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내 방 서가의 한구석에 꽂혀 있는 페이퍼 바운드의 이 책이 그렇게 비쌌던가, 하고 뒤쪽의 카바를 보니 정가가 8.240엔이나 했다. 메어리 E. 게클러가 쓴 『구텐베르크』의 일역본(일본 인쇄학회출판부, 1994)이다. 귀국한 뒤 확인해 보니, 장인이 주신 그 책에는 2001.11.26이라는 구입 일자가 표지 안쪽에 연필로 적혀 있다. ‘目光’으로 보이는 주기가 함께 적혀 있는데,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다. 해외 서점에서 신간을 주문하신 것은 아니기에, 고서점의 이름을 약어로 표시해 두신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장인은 생전에 고서점들을 돌아다니시면서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이면 꼭 구해주시고는 하셨다. 하지만 나는 고서 구입이 취미로 될까봐 고서에 대한 금욕의 내공을 키우고 있던 참이라, 크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장인이 주시는 서적들의 북 히스토리를 일일이 물어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조선후기 지식인들은 책 하나를 구입하거나 증여받거나 하면 소장기나 독후기를 적는 감격스런 ‘의식’을 치렀다. 심지어 남에게서 책을 빌려 초록을 하고서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의식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3.
청계천가에 즐비했던 많은 고서점들이 폐업을 하고, 광화문의 고서점, 신림동의 고서점, 고려대 부근 우석병원 건너 고서점이 어디론가 이전하고 만 것은 서글픈 일이다. 나는 학부 시절 토요일마다 청계천 6가에서 청계천 3가까지 고서점들을 탐방하고, 종로 2가의 종로서적과 양우당에 들른 뒤, 광화문의 해외출판물 판매서점을 기웃거려보고, 명동의 소피아 서점을 거쳐, 남산 길로 올라가 이태원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던 기독교 서점에까지 발품을 팔았다. 걸을수록 힘이 솟고 책방을 하나하나 거칠 때마다 흥이 돋았다. 돈이 없어 좋은 책을 그리 사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인사동에 몇몇 고서점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인사동의 고서점들은 버클리의 모에나 간다의 고서점들과는 달리 책을 열람하기가 불편하다. 통문관은 많이 달라졌지만, 문우서림은 선본과 희귀본을 주로 취급한다. 우리 고서점들은 아무래도 전공 서적들을 주제별로 진열하고 있지 않으므로, 들러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요즈음 많은 분들이 인터넷 경매로 책을 산다고 한다. 선본이나 희귀본이라면 몰라도, 전문서적이나 일반서적은 직접 열람한 뒤 구입을 결정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고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손에 펼쳐보는 첫 만남의 설렘을 어떻게 인터넷 상에서 느낄 수 있겠는가!
지난 학기 관악의 대학원에 강의를 나갔다가, 하루 시간을 내어 낙성대역 부근 고서점에 들렀다. 예전에는 꽤 괜찮은 전공서적들을 구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좋은 책을 만나지 못했다. 책의 진열 상태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누가 우리의 고서점들을 쇠퇴하게 만들었는가? 남의 탓이 아니다. 고서와의 첫 만남에서 갖는 설렘을 중시하지 않게 된 내 자신, 소장기나 독후기를 적는 의식을 치를 줄 모르는 내 자신, 이 사람이 바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글쓴이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김시습 평전』,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시의 세계』, 『한학입문』, 『한시기행』,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길을 가다』 등
· 역서 : 『불교와 유교』, 『주역철학사』, 『원중랑전집』, 『금오신화』, 『한자 백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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