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함께읽기

[경기실학, 실학자들 3] 실학의 집대성 - 다산 정약용

문근영 2010. 3. 24. 07:11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남양주 두물머리.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에서 흘러 내린 북한강,

두줄기 강이 만나 더욱 풍요로워진 강줄기는 한강이 된다.

 

그 시점인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는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가와 무덤이 위치해 있다.

넉넉한 강물만큼이나 큰 이상을 품었던 다산의 체취가 곳곳에서 묻어 난다.

 

다산이 태어나 유년시절과 18년동안의 유배생활을 접고 말년을 보냈던 생가가 위치한 곳은

현재 ‘마재마을’로 불린다. 다산이 생존하던 당시는 광주군 초부방 마재부락(마현리)이었다.

지금은 팔당댐이 물을 막고 있어 수량이 풍부하며

강변에는 수백년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현듯 넘실대는 물결따라 지난 역사의 흔적이 눈가에 와 닿는 듯하다.


다산은 자신의 고향을 ‘열상(洌上)’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한강의 옛 이름이 ‘열수(洌水)’였던 것에 기인하며 한강 상류 마을이란 의미를 지닌 것 같다.

다산은 스스로를 ‘열상노인’이라고 칭해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했다.

 

현재 다산의 생가와 일대는 경기도 기념물 제7호로 지정돼 다산유적지로 보호받고 있다.

생가인 여유당과 사당, 기념관, 문화관, 문화의 거리 등이 조성돼 있으며

다산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후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다산은 ‘학문의 한류’를 이끈 인물이다.

베트남의 국부로 추앙받는 호치민의 서가엔 다산의 ‘목민심서’가 꽂혀 있었다.

수시로 탐독하며 바른 관료의 이상을 꿈꾸지 않았을까.

호치민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묘원에 ‘목민심서’를 함께 묻었다.

 


◇ 다산과 정조


다산이 22세 때(1783년) 소과에 합격한 후

정조와 첫 대면한 이래 정조 타계(1800년)까지 17년동안 두 사람은 군신관계이자 사제관계였다.
다산은 정조를 통해 사회개혁의 의지를 다졌고

정조는 새로운 신하와 함께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다산은 암행어사와 참의, 좌승부지 등을 거쳤다.
정조는 천주교 문제로 수세에 몰린 다산을 돕기 위해

금정찰방이나 곡산부사로 강등시켜 화를 모면하게 했다.

이후 1799년 내직으로 돌아왔지만 정조 서거 후 1801년 책통사건에 연루돼 유배길에 오른다.
그는 정조와 함께 실학의 산물인 수원 화성 건설에 몰입한다.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거중기 설계는 물론 1793년 화성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 강진에서의 다산


18년동안의 강진 유배생활은 고통의 세월이자 학문적 결실을 맺은 기간이었다.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강진 유배시절 다산은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주축을 이룬 경학을 집중 연구했다.
이청 · 황상 · 이강회 · 이기로 · 정수칠 · 윤종문 등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현대 다산 초당은 1958년 해남 윤씨들이 주축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폐가로 방치된 것을 정면 5칸, 측면 5칸 기와집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강진군은 다산 유배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역사의 순리에 맞다고 판단,

내년께 초가집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 다산의 사상


사상적으로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의 학풍을 계승했다. 그의 경세치용적 실학사상은

영 · 정조대 이후 청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북학파의 이용후생 사상도 받아들였다.

그의 사상은 ‘육경사서’ 등 경전 주석에 나타난 경학 체계와

국가 경영에 관한 제도 및 법규의 기준을 담은 ‘경세유표’,

지방관리들이 부임부터 물러날 때까지 지켜야 할 윤리강령을 담은 ‘목민심서’ 등을 펴냈다.

서학의 과학적 사고를 수용해 객관적 사실에 대해 분석적이고 실증적인 방법도 추구했다.


 

다산 정약용 영정.

 

 

■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

 

인간적 면모까지 조명… 쉽게 풀어쓴 실용서 계획”

“다산의 편지 글을 읽으면 그의 인간적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은 다산 마니아다.

학문적인 부분은 물론 다산 정약용이란 거목이 지닌 인간적인 풍모까지 조명하고 있다.

 

“아들에게 쓴 글을 보면 여느 아버지와 같은 당부와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형님인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는 또 다른 느낌을 던져 줍니다.”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에 초점을 맞춘다면 오히려 다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김 실장.

 

정조대왕과 함께 조선후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다산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다산에 대해 너무 상찬만 하는 분위기에서 탈피하려고 합니다.

정치 엘리트로 오랜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그의 궤적을 보며 인생이 결코 쉽지 않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김 실장이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다산의 사상을 현 시대에 맞게 조명하는 것.

“그의 많은 독서량이 방대한 저술로 꽃피웠습니다.

특히 ‘목민심서’의 경우 지방관이 갖춰야 할 매뉴얼로 철학이 담겨 있죠.

당시의 현실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현 시대와 맞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단순히 청렴을 강조하기보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갖춰 오늘날에도 적용 가능한 부분이 많습니다.”

다산연구소는 다산의 사상을 보급하는 차원에서 쉽게 풀어쓴 실용서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다산이 주장한 실천 내용을 오늘에 맞게 적용하는 작업을 추진중입니다.

실학산책 등 실학유적 답사를 비롯해

실학자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계승 · 보급하는 사업을 다채롭게 진행할 것입니다.”

- 경기일보 2006-6-29 / 이형복기자 bok@kg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