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미공개 유물 최초 공개
최초 공개되는 다산 정약용 선생 친필 편지
편지, 지도, 서첩 등 20여점 
(강진=연합뉴스) 송형일 기자 =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친필 편지 등 미공개 유물이 공개된다.
강진군은 15일 "다산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와 서첩(書帖)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유물 20여점을 일반 전시회에 앞서 18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유물은 강진군이 오는 29일부터 열리는 청자문화제 다산유물 특별전에 전시하기 위해 다산 후손 등 소장가로부터 임대 받았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유물로는 다산 친필 요조첩(窈窕帖)과 편지, 자휘 서간, 다산 사경첩(四景帖), 윤시유 지도 등이다.
특히 다산이 오랜 지인이었던 윤시유의 재혼에 대한 축하 머리글을 쓰면서 탈상(3년)전 재혼에 대한 법과 현실 사이의 곤혹스러움을 그대로 표현, 눈길을 끌고 있다.
상처한 지 3년안에 재혼이 금지된 제도와 자녀 양육 등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이를 지키지 못한 지인의 입장을 의식한 다산의 고민이 글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이밖에 아들과 외손자의 편지, 다산이 윤시유와 함께 그렸다는 강진만 일대 해역이 자세히 나와 있는 지도, 가깝게 지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시 작품과 판액 등 다수가 처음 공개된다.
강진군은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유물 등 모두 40여점을 특별전에 전시, 관광객에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군(文化郡)의 위상을 높일 계획이다.
유물 공개 자리에는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문화재 전문가 등이 참석, 유물에 대한 평가 등도 할 계획이다.
황주홍 강진군수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다산 선생의 후손을 찾아 국보급 소장품을 어렵게 양해를 구한 뒤 공개하게 됐다"며 "다산 선생을 재조명하는데도 아주 귀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 광주출신인 다산은 신유교난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된 뒤 18년간 학문에 정진하면서 지방행정의 개혁과 쇄신, 토지분배, 노비제 폐기 주장 등 개혁사상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nicepen@yna.co.kr (끝)
[연합뉴스 200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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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미공개 유물 최초 공개
- 편지, 지도, 서첩 등 20여점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의 친필 편지 등 미공개 유물이 공개된다.
강진군은 15일 "다산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와 서첩(書帖)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유물 20여점을 일반 전시회에 앞서 18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유물은 강진군이 오는 29일부터 열리는 청자문화제 다산유물 특별전에 전시하기 위해 다산 후손 등 소장가로부터 임대 받았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유물로는 다산 친필 요조첩(窈窕帖)과 편지, 자휘 서간, 다산 사경첩(四景帖), 윤시유 지도 등이다.
특히 다산이 오랜 지인이었던 윤시유의 재혼에 대한 축하 머리글을 쓰면서 탈상(3년)전 재혼에 대한 법과 현실 사이의 곤혹스러움을 그대로 표현, 눈길을 끌고 있다.
상처한 지 3년안에 재혼이 금지된 제도와 자녀 양육 등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이를 지키지 못한 지인의 입장을 의식한 다산의 고민이 글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이밖에 아들과 외손자의 편지, 다산이 윤시유와 함께 그렸다는 강진만 일대 해역이 자세히 나와 있는 지도, 가깝게 지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시 작품과 판액 등 다수가 처음 공개된다.
강진군은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유물 등 모두 40여점을 특별전에 전시, 관광객에 다양한 볼거리와 문화군(文化郡)의 위상을 높일 계획이다.
유물 공개 자리에는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문화재 전문가 등이 참석, 유물에 대한 평가 등도 할 계획이다.
황주홍 강진군수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다산 선생의 후손을 찾아 국보급 소장품을 어렵게 양해를 구한 뒤 공개하게 됐다"며 "다산 선생을 재조명하는데도 아주 귀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 광주출신인 다산은 신유교난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된 뒤 18년간 학문에 정진하면서 지방행정의 개혁과 쇄신, 토지분배, 노비제 폐기 주장 등 개혁사상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강진=연합뉴스)
* 중앙:200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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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친필편지 등 유묵 다량발굴
다산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전남 강진에서 다산의 친필 편지 등 미공개 유묵이 다량 발굴됐다.
이와 함께 추사가 다산의 제자에게 준 편액 글씨, 친필 등도 함께 발견됐다.
강진군은 15일 “다산이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와 서첩(書帖)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유묵 20여점을 일반 전시회에 앞서 18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유물은 강진군이 오는 29일부터 열흘간 강진에서 열리는 청자문화제 ‘다산유물 특별전’에 전시하기 위해 다산 후손 등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임대받았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유물 중에는 다산 친필 간찰, 제자를 위해 써준 시첩, 산문 등이 들어 있어 유배지 강진생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다산의 친필 유묵으로는 ‘견월첩(見月帖)’ ‘품석정서(品石亭序)’ ‘을축동작여치원부(乙丑冬作與●園賦)’ 등이 꼽힌다. 또 다산초당의 풍광을 노래한 ‘사경첩(四景帖)’도 주목할 만하다.
견월첩은 다산이 아암 혜장선사를 위해 쓴 한시와 편지를 묶은 시첩으로 다산이 강진 고성암(高聲庵)에 머무를 당시 혜장선사와의 교유관계를 기록하고 있다. 혜장선사는 정약용에게 ‘다산’(茶山)이라는 호를 지어주고 ‘주역’을 가르쳐준 스님으로, 견월첩에는 스님과 유학자간의 종교를 넘어서는 우정이 담겨 있다. 품석정서는 다산이 품석정이라는 정자에 부친 글로, 옛 사람의 고사를 들어 경치를 즐기는 법을 기술하고 있다. 을축동작여치원부는 유배 5년째를 맞는 1805년 보은산방에서 머물던 다산이 치원 황상(黃裳)의 한시에 화답한 시로 제자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추사의 유묵으로는 추사 김정희가 다산의 제자 황상을 위해 써준 ‘치원진완(●園珍玩)’과 현판글씨첩 등이 새로 발굴됐다. 치원진완은 추사 김정희와 동생 명희·상희 3형제가 1869년 황상문집 발간을 축하하며 써 준 서문 형식의 글이며, 현판글씨첩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 ‘노규황량사’(露葵黃梁社) 등의 편액용 큰 글씨가 들어 있다.
글씨를 살핀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관 큐레이터는 “다산 하면 주로 경학자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에 발굴된 유묵들은 작품성이 뛰어나 예술가로서 면모를 잘 보여준다”며 “유배지 강진에서 제자, 스님들과 주고받은 글이 많아 유배지의 생활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 경향: 2005년 0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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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미공개유물 18일 공개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의 친필 편지(사진) 등 미공개 유물이 공개된다.
강진군은 15일 “다산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와 서첩(書帖)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유물 20여점을 일반전시회에 앞서 18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유물은 강진군이 오는 29일부터 열리는 청자문화제 다산유물 특별전에 전시하기 위해 다산 후손 등 소장가로부터 임대받았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유물로는 다산 친필 요조첩(窈窕帖)과 편지, 자휘 서간, 다산 사경첩(四景帖), 윤시유 지도 등이다.
특히 다산이 오랜 지인이었던 윤시유의 재혼에 대한 축하 머리글을 쓰면서 탈상(3년) 전 재혼에 대한 법과 현실 사이의 곤혹스러움을 그대로 표현, 눈길을 끌고 있다.
상처한 지 3년 내 재혼이 금지된 제도와 자녀양육 등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이를 지키지 못한 지인의 입장을 의식한 다산의 고민이 글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이밖에 아들과 외손자의 편지, 다산이 윤시유와 함께 그렸다는 강진만 일대 해역이 자세히 나와 있는 지도, 가깝게 지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시 작품과 판액 등 다수가 처음 공개된다.
강진군은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유물 등 모두 40여점을 특별전에 전시, 관광객에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함과 동시에 군의 위상을 높일 계획이다.
경기 광주 출신인 다산은 신유교난 사건으로 강진으로 유배된 뒤 18년간 학문에 정진하면서 지방행정의 개혁과 쇄신, 토지분배, 노비제 폐기 주장 등 개혁사상으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강진=박진주 기자, 연합뉴스
pearl@segye.com
[세계일보 200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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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유물 13점 최초공개…29일부터 특별전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의 친필 편지 등 그동안 후손들이 간직해온 유물 다수가 15일 처음 공개됐다.
전남 강진군은 다산 선생이 지인에게 보낸 친필 편지와 서첩 등 지금까지 미공개된 13점을 포함,유물 46점을 오는 29일부터 여는 ‘청자문화제 다산유물 특별전’에 앞서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유물은 다산 후손 등 10여명의 소장가로부터 임대한 것으로 이 중 다산 친필 요조첩(窈窕帖)과 편지,다산 사경첩(四景帖),윤시유 지도 등은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특히 오랜 지인이었던 윤시유의 재혼을 축하하며 보낸 글에서 ‘탈상(3년)전 재혼금지’를 규정한 법과 현실 사이의 곤혹스러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다산은 글에서 상처한 지 3년 안에는 재혼을 금지했던 당시 제도와 자녀 양육 등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 재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지인의 입장에 동감을 표시하고 있다.
또 다산 아들과 외손자가 쓴 편지,다산이 윤시유와 함께 그렸다는 강진만 일대 해역 지도, 가깝게 지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쓴 시 작품과 판액 등도 눈길을 끈다.
오는 18일 군청에서 일반공개와 함께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문화재 전문가 등이 참석,유물에 대한 평가를 할 예정이다.
본관이 전남 나주로 경기 광주 출신인 다산은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순조 1년인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됐으며 이후 18년간 학문에 정진하면서 500여권의 저술을 통해 정치기구의 전면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농민의 토지균점,노동력에 의한 수확물의 공평한 분배,노비제 폐기 등을 주장했다.
강진=장선욱기자 swjang@kmib.co.kr
[국민일보 200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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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그린 지도, 추사와 함께 쓴 글 …
-전남 강진군, 정약용 미공개 유물 17점 공개
▶ 추사가 다산에게
추사가 쓴 글씨의 일부. 다산이 추사와 함께 다산의 제자인 황상(1788~1870)이 머문 산방을 찾아 하룻밤을 지내면서 ‘남원 노규 조절 동곡 황량 야용(南園 露葵 朝折 東谷 黃粱夜)(남쪽 밭 이슬 젖은 아욱 아침에 꺾고 동쪽 골짜기 누른 조를 밤에 찧는다)’는 시를 지었다. 그러자 추사가 이 시구 중 露葵와 黃粱에다 社를 붙여 글을 썼다. 이는 ‘고결한 선비의 거처’라는 뜻이다.
▶ 다산이 그린 지도 다산과 다산의 제자 윤시유가 함께 제작했다고 전해지는 채색 지도. 영암에서 제주 추자도까지 여러 섬들이 채색으로 표시돼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의 예술적 면모를 조명해 볼 수 있는 친필 편지.서첩 등 유물 17점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전남 강진군은 18일 강진군청 회의실에서 자료를 보관해온 다산의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요조첩(窈窕帖).견월첩(見月帖).품석정서(品石亭序) 등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유물을 공개했다.
공개된 유물은 대부분 서간(書簡)이나 서첩(書帖) 등이며 유일하게 강진만 일대 해역을 표시한 지도도 공개됐다. 이 유물은 강진군이 29일부터 열리는 청자문화제 다산유물 특별전에 전시하기 위해 다산 후손 등 소장가로부터 어렵게 공개를 승낙받았다.
이번에 최초 공개된 유물로는 다산손자(대번)와 정학연 편지, 윤시유와 정학포 서간, 다산 친필 서간, 정유산 선생 급각인필첩, 유대인 선생 이천지, 견월첩, 품석정서, 자휘서간 등이다. 특히 다산이 활동한 시우회(詩友會)의 시 모음집인 석재죽란 고성애국과 다산이 제자 등에게 보낸 친필 서간, 요조첩, 견월첩 등 다산 친필 유물이 다수 공개됐다.
다산이 오랜 지인이었던 윤시유의 재혼 축하 후기(後記)를 쓴 요조첩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또 활발한 교류 활동을 폈던 추사 김정희와 다산이 함께 하룻밤 묵은 뒤 썼다는 보정산방(寶丁山房)도 첫선을 보였다. 이 글은 추사와 다산의 글이 한 곳에 써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에 공개된 유물들은 다산 제자의 후손 등이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것들로 친필 원본임을 확신한다"며 "문화재급 자료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강진=천창환 기자
* 중앙:2005.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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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에게 써준 글
18일 공개된 다산 정약용 선생 관련 유물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의 싯구인 로류(露葵)와 황량(黃梁)에 사(祀)를 붙여 쓴 글중 로규(露葵)를 문화재 관계자가 펴 보이고 있다.
(강진=연합뉴스) 2005.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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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학문 뒤엔 18제자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친필 서첩과 서간 작품들.
강진 유배시절(1801~1819) 다산은 혼자가 아니었다. 강진에 내려갈 때에는 혼자였으나 유배에서 풀려날 때 그에겐 ‘18제자’ 그룹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선생 유물특별전’(7·30~8·31, 강진 다산유물전시관)을 공동 주최하는 강진군과 예술의전당이 개막에 앞서 공개한 유묵 35점은 강진에서 다산이 행한 교육 및 학문활동, 제자들과의 교유관계를 잘 보여준다.
◇다산과 황상의 특별한 만남=1801년 겨울 다산은 북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강진 유배지에 도착한다. 가는 집마다 문전 축객을 당한 그를 따뜻하게 맞이한 사람은 동문 밖의 주막집 주인. 그는 이곳에서 기숙하며 유배생활에 들어간다. 이때 다산의 학문적 명성을 듣고 학동들이 찾아온다. 손병조, 황상, 황취, 황지초, 이청 등. 이 가운데 해배 뒤에도 교유가 이어진 제자는 황상과 이청 정도. 황상은 훗날 ‘치원유고’라는 문집을 낼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으며 이청은 다산과 함께 ‘대동수경’을 편찬하고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주석을 붙일 정도로 학문적으로 대성한다. 
공개 자료 가운데 ‘증산석’(贈山石)은 다산이 15세의 황상을 처음 만난 1802년 10월, 어린 제자에게 학문을 권하며 쓴 글이다. “내가 산석(山石:황상의 아명)에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하니 그는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말하기를 ‘공부하는 자는 세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결혼을 축하하며… ‘아름다운 시냇가의 집에 새 사람을 맞는다네/잔치 자리에선 술을 마시고 신부 방엔 화촉 밝혔네/눈을 들어 꽃(신부)을 보니 정신이 어떨떨/다만 옥 같고 구슬 같다고만 말한다네….’
다산이 제자 윤시유(자는 군보)의 결혼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쓴 시. 재혼이지만, 제자의 결혼을 축하하는 스승의 진심이 잘 드러나 있다. 오의보와 소동파의 사(詞) 두 곡조를 참조해 지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황상은 이 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 간직한다. 황상이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게 된 것은 순전히 스승의 가르침 덕분이다. 황상은 스승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시를 주고 받으며 사제관계를 이어간다. 초당시절 다산이 보은산방에 있는 황상에게 보낸 시(‘차운기황상보은산방’)는 끈끈한 정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다산은 시 말미의 덧붙인 글에서 ‘나의 제자 가운데 시(詩)를 꼽으라면 바로 그대일 뿐”이라며 황상을 극구 칭찬한다.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이 고향에서 보낸 편지(1828년 6월12일자)에는 황상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제자를 그리워하는 스승의 정이 배어난다. 다산은 편지에서 강진의 농사를 걱정하고 이청 등 제자들의 안부 묻는 것을 잊지 않는다.
강진 읍내 시절 다산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교유하며 또, 혜장의 소개로 초의선사도 알게 된다. 이번에 공개된 ‘견월첩’(見月帖)은 다산이 혜장선사를 위해 쓴 친필 한시첩이다.
이 시기 특기할 만한 일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손수 한문교과서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점이다. 다산은 ‘천자문’ ‘소학’과 같은 기존 한문교재들이 지나치게 어렵고 조선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알고, 새로운 교재 편찬에 나섰다. 1804년에는 ‘천자문’을 대체할 ‘아학편’을 짓고, 곧이어 ‘제경’(弟經)을 편찬했다. 이번에 발굴된 ‘제경’은 다산이 ‘효경’ ‘소학’ 등에서 아동들이 가져야 할 예의범절을 담은 구절을 뽑아 모은 윤리교과서로, 강진 제자 윤시유가 친필로 옮기고 이청이 발문을 써 강진에서 교재로 널리 쓰였음을 보여준다. 
부끄럼없이 살아라 ‘…옛사람의 말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다산에 갈수 없음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 다시 간다 하더라도 반드시 부끄러운 빛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1823년 4월 경기 고향집으로 찾아온 강진의 두 제자(기숙, 금계)에게 써준 글.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다산초당의 ‘18제자’=강진 주막집에서 5년, 보은산방에서 1년, 제자 이청의 집에서 2년을 머문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초당에서의 10년은 다산의 학문이 무르익던 시기.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학문적 토론도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이 시절 제자 그룹은 ‘다신계절목’에 나와있는 ‘18제자’가 중심이다. 대부분 다산초당을 제공한 윤씨 집안의 자제들이나 이유회, 이강회 등과 다산의 두 아들 정학연, 정학유도 들어있다. 또 18제자는 아니지만 윤시유, 윤창모, 윤정기, 이시헌 등도 다산에게 배웠다. 이 시절 다산은 다산강학에 참여했던 제자 윤창모를 사위로 삼기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다산의 초당 시절 유묵으로는 제자 윤시유의 재혼을 축하하는 시모음(‘요조첩’), 품석정의 자연 풍광을 노래한 시첩(‘품석정서’), 백운동의 지인들에게 쓴 편지(‘백운통천’), 국화의 덕을 찬미한 글(‘석재죽란 고성애국’), 정석(丁石)·약천(藥泉)·다조(茶조)·연지석가산(연못) 등 다산초당의 주변 경관을 묘사한 시(‘다산사경’) 등이 있다. 다산은 ‘요조첩’에서 중국에서 유행한 ‘하신랑’이란 사(詞)의 곡조를 써서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심경을 그려냈다. 또 ‘석재죽란’에서는 “여름에는 잎을 보고 가을에는 꽃봉오리를 보고 낮에는 자태를, 밤이 되면 그림자를 관찰한다”는 국화감상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초당 시절 다산은 논어고금주, 시경강의, 경제유표, 목민심서 등 주목할 만한 저술들을 쏟아냈다. 다산이 이토록 많은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18제자’로 대표되는 제자들의 도움이 컸던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공부하라 ‘내가 산석에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하니 그는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한다.…’. 강진에 도착한 이듬해인 1802년 10월17일, 다산이 처음 만난 황상(자는 산석)에게 학문하는 자세를 일깨워 준 글.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고 간직했다.
◇해배된 뒤에도 그리움이…=다산은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다산초당을 잊지 못했다. 1823년 18제자의 일원인 윤종삼과 윤종진이 스승의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다산은 초당의 지붕은 이었는지, 연못의 잉어는 얼마나 자랐는지, 백련사의 동백은 무성한지 등 강진의 안부를 묻는다. 이번에 공개된 ‘기숙(윤종삼)과 금계(윤종진)에게 준 글’에는 이러한 초당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상세하다.
다산은 또 수시로 제자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월출산 아래 백운동의 이씨(이시헌으로 추정됨)에게 보낸 편지 등 4통을 엮은 두루마리가 그것이다. 제자들도 경기 마현(현 능내리)의 다산 생가를 방문하고 편지를 띄우며 안부를 전했다. 한편 이 무렵 추사 김정희는 다산의 아들 학연과 학유의 소개로 강진의 다산 제자들과 교유관계를 맺는다. 이번에 공개된 ‘노규황량’(露葵黃粱), ‘보정산방’(寶丁山房), ‘용구초당(蓉鷗艸堂)’과 같은 추사의 편액글씨는 대부분 추사가 강진의 다산 제자들에게 써준 것들이다.
‘정약용의 강진유배기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임형택 성균관대 교수는 “다산이 강진에서 양성한 제자들은 단순히 스승을 돕는 차원이 아니라 ‘다산학단’을 이룰 만큼 학문적 성과도 적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차장은 “서예사적으로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과 추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제자들의 유묵에 대한 조명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 경향: 2005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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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7.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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