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걷다
걷기가 한창이다. 고장마다 걷기 길을 열고 가꾸니 속도감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느림과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걷기를 즐기고 있다. 특히 요즈음 G 세대들은 즐거움과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으로 받아드리는 것 같다.
발은 전진의 메타포라 했다. 걷는 일은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물리적인 현상만이 아닌 감성과 의식의 변화를 동반하는 사유와 사색의 시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자연을 돌아보며 자신과 현실을 직시해 보는 일은 누구나 간에 더없이 보배로운 시간이 될 것이다.
전국의 걷기 운동을 촉발시킨 제주도엔 올레가 한창이다. 3년 전 시작된 올레길이 벌써 16번까지 개척되었으니 머지않아 제주도 일주 길이 열릴 것이며 더 나아가 우리나라 곳곳이 실핏줄처럼 이어질지도 모른다.
올레길을 처음 시도한 서명숙씨는 놀멍, 쉬멍, 걸으멍을 내세우며 제주도 걷기 코스를 개척했었다. 제 고향 제주를 제대로 알리기 위함이었는데 마침내 전국을 걷기의 열풍으로 휩 쌓이게 만든 것이다. 서귀포읍에서 자란 어린 소녀가 서울에서 터를 하며 살다 그 좋은 기자, 편집직을 그만두고 제 고향 제주도를 알리는 올레길 걷기를 창시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하고 장한 일인가? 50줄에 접어든 그가 스페인 산티아고 800km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내내 제 고향 제주도를 떠 올렸단다. 여정 막바지에서 만난 어느 영국 여자는 “우리가 이 길에서 누린 위안과 행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한다. 당신은 당신 나라로 돌아가서 당신의 까미노(길)를 만들어라. 나도 내 나라에 가서 내 길을 만들 테니~~” 하고 당부하더란다.
그 후 그는 서울 생활과 직장을 접고 고향 제주도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 때문이 이런 일을 시작했던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제주도를 찾아 파란 화살표를 따라 걸어 보았다.
제주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렇다면 걸어 보라. 제주도를 걷는 일은 꼭 올레길 만이 아니다. 한라산도 좋고 오름도 좋다. 그 오름들이 그냥 두루뭉술한 억새밭이라 여기지 마라. 그 오름에는 분화구도 있고, 천연림도 있고, 민둥이 억새밭도 있고, 죽은 영혼을 감싸고 있는 무덤들도 안고 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된 거문오름도 있으며, 물영아리 오름에는 신기하게도 물이 고여 있다. 사려니 숲길을 걷다 보면 그 우아하고 아름다움에 반하지 않을 수 없고 곶자왈의 난대림 숲길에서 우리에게도 아마존 같은 산소 제조창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제 제주도는 스치듯 둘러보는 일회성 위락의 여행지로 여길 것이 아니라 꼼꼼히 둘러보며 참모습을 찾아 볼 때도 된 것이다.
제주도 올레길 두 곳을 택했다. 하나는 제주도의 허파라는 곶자왈 숲길을 지나는 11코스와 제주도 제일의 해안 절경을 따라 걷는 10코스이다. 어느 길 하나 다 걷고 싶지 않았을까 만, 걷지 못한 길은 다음 기회가 있을 터이니 그리 아쉬워 할 일도 아니다.
봄이 저만치 온기를 품고 오는 길목이어서 제주도는 푸성귀처럼 풋풋했다. 한라산은 안개에 속에 숨어 있지만 숲은 푸르고 들녘엔 마늘과 양배추가 초록바다를 이루고 담 밑엔 수선화와 금잔화가 곱게 피어 있었다. 물에 젖은 안개와 흩뿌리는 봄비는 추위를 동반하지 않아 젖고 맞을 만도 했다.
먼저 11코스는 물영마을에서 시작했다. 곶자왈을 보기 위함이다. 곶자왈은 제주어 사전에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정의돼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점성이 높은 용암류가 흐르면서 만들어낸 암괴들이 널려 있는 지대에 형성된 숲을 말한다.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개가시나무, 붉가시나무 등 가시나무를 주종으로 해서 녹나무, 때죽나무, 팽나무 등 상록 활엽수가 주로 분포되어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 숲을 자랑한다. 컴컴한 숲 속에는 고사리와 고비, 콩난과 송악이 지표면을 덮 은채 치열하게 자기 삶의 영역을 지키거나 넓혀가고 있다. 여기 숲 또한 단순한 나무의 집합이 아닌 모든 것이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 되어 있다.
올레길을 걸으며 그런 젊은이들을 가끔 만날 수 있었다. 도시의 귀퉁이에서 시간을 죽이고 영혼을 갉아 먹으며 정신이 피폐해지는 젊은이들에 비해 얼마나 건강하고 푸릇하며 장한 이들인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곱게 인사를 하더니 부지런히 걸어간다.
숲을 벗어나 신평리에 도착하자 다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날 바닷가를 걷기에는 힘들 것 같아 아쉽지만 접어두고 다음 날 다시 10코스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물영아리를 오르고 또 유네스코자연유산인 거문오름에서 숲의 장엄한도 체험했고 사려니 겨울 숲길을 거닐며 가을엔 기어이 다시 와보리라 다짐도 했었다.
마지막 날 10코스를 걷기 위해 나섰다. 이 코스는 안덕면 화순해수욕장에서 시작하여 산방산을 지나 송악산을 넘어 대정읍 하모리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해안코스이다. 제주올레를 통해 대중에게는 처음 소개된 퇴적암지대 바위길과 소금막 항만대의 비경은 걸어보지 않고는 접해 볼 수 없는 곳이다.
마라도 선착장을 지나 해안 사구를 지나간다. 아직도 일렁이는 하얀 파도와 바람과 안개 속에서 형제섬이 출렁인다. 그 너머에 가파도 마라도가 있지만 오늘은 파도에 잠겨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자전거로도 갈 수 없는 이 길은 팍팍한 해안사구를 따라 오로지 두 발로 걸어야 하는 제주 제일의 바닷가 올레 길이다.
고향을 떠나 본 사람 만이 고향의 그리움을 알 듯, 길을 떠나 본 사람만이 자기가 가야할 곳이 어딘가를 안다. 길은 어디에도 있다.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자기 길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삶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 길은 단순하게 공간의 연결이 아닌 영혼의 안식과 미학과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 바람, 안개를 느끼고 싶은가? 그런 날, 제주도를 찾아라. 안개 속에 잠긴 숲은 더 신령스러울 것이며 비바람 속의 제주도는 더 생명이 넘칠 것이다. 그 곳에 가면 아직 가야할 길은 멀고 찾아야 할 곳도 많고 알아야 할 것들은 더더욱 많음을 깨달을 것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주도이기 때문이다.
2010. 2. 28. Fo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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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으시는 곡은 Violin & Piano Concerto - 바람에 실려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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