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나무 한 권의 낭독 / 고영민

문근영 2010. 2. 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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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 한 권의 낭독

       고영민         

        

 

 


       바람은 침을 발라 나무의 낱장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언제쯤 나도 저러한 속독을 배울 수 있을까
       한 나무의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이
       한 권의 감동으로 오래도록 붉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저렇게 너덜너덜 떨어져나갈까
       이 발밑의 낱장은 도대체 몇 페이지였던가
       바람은 한 권의 책을 이제
       눈 감고도 외울 지경이다
       또 章들이 우수수, 뜯겨져나간다
       숨진 자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듯
       바람은 제 속으로 떨어지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손바닥으로 받아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낱장은 손때 묻은 바람 속을 날다가
       끝내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밟힌다
       철심같이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인적 드문 언덕에 구부정히 서서
       제본된 푸른 페이지를 모두 버리고
       언 바람의 입으로 나무 한 권을
       겨우내 천천히 낭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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