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담고 싶은 법정스님의 글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제14회]산방한담

문근영 2009. 11. 6. 10:58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제14회]


산방한담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 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새 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법정 스님 수상집 <산방한담> 중에서


* 얼마 전 서울의 명동 성당에서 법정 스님을 초청해 카톨릭 신도들과 수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법문을 들었다. 명동 성당이 세워진 지 백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강연회였다. 불교 수행자가 그 설교단에 올라 법문을 한 것은 그때가 최초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스님은 이렇게 말문을 여셨다. "방금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 자신도 더러 수녀원에 가서 강론한 적은 있지만 이런 큰 성당에서 말하게 된 기회는 오늘이 처음입니다. 저를 이 자리에 초대해 주신 명당 성당측에 감사 말씀드리고, 성당이 축성된 지 올해가 백 돌 되는 해에 저와 같은 사람을 이런 자리에 서게 해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청중들 사이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 있던 나 역시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두 종교의 만남이라는 거죽의 일이 아니더라도, 십자가 앞에 서 계신 스님의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가 알기로 스님은 그동안 어떤 거국적인 종교계의 기도회나 합동모임에도 참석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분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런 형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내미실 분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스님은 기독교의 몇몇 분들과 친분이 두터우시다. 오랜 세월을 장익 주교님과 만나오면서 두 분 사이에 복장의 차이뿐 다른 차이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장안의 언론이 떠들썩했지만, 서울의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해 불상 앞에서 축사를 읽으신 것도 따라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에 대한 회답으로 스님은 그 해 크리스마스에 성탄절 축하 메세지를 보내셨다.

스님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아간 모습을 좋아하셔서 자주 언급하신다. 사막 교부의 일화들도 곧잘 인용하신다. 그런가 하면 랍비와 힌두교 시인들도 좋아하신다. 나를 만날 때마다 매번 크리슈나무티르의 '마지막 일기'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감동을 말씀하신다. 연륜 있는 한 수도자의 이러한 태도는 나 자신 뿐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큰 깨우침이라고 나는 믿는다.

네덜란드 출신의 명상화가 프레데릭 프랑크는 말한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이라는 것 너머에 있고, 진리는 종교라는 울타리 밖에 있으며, 사랑은 껴안는 행위 너머에 있다.' 불교 전통에 따라 누군가 삼배를 올리면 스님은 그렇게 불편해 하실 수가 없다. 그 불편해 하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순수함이 드러난다. 그 순수함과 진실을 직시하는 눈빛은 종교에 오래 몸담은 사람일수록 가장 먼저 잃어버리기 쉬운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옛 선승들도 '배는 강을 건너라고 있는 것이고, 종교는 그것을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임을 가르쳤지 않은가. 명동 성당의 설교단에 서서 약간은 수줍어하는 말투로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를 예로 드는 스님을 바라보면서, 나는 문득 한 사람의 참인간이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류시화의 '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