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제16회]
서 있는 사람들
며칠동안 비가 내리고 안개가 숲을 가리더니 수목들에 물기가 배었다. 겨울동안 소식이 묘연하던 다람쥐가 엊그제부터 양지쪽 헌식돌 곁에 나와 내 공양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해 늦가을 무렵까지 윤기가 흐르던 털이 겨울을 견디느라 그랬음인지 까칠해졌다. 겨우내 들을 수 없었던 산비둘기 소리가 다시 구우구우 울기 시작했고, 밤으로는 앞산에서 고라니 우는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 치고 있다. 나는 한밤중의 잠에서 자주 깨어 일어난다. 이런 걸 가리켜서 사람들은 봄의 시작이라고 한다.
-법정 스님 수상집 <서 있는 사람들> 중에서
* 여러 해 동안 법정스님을 뵙고 그분과 대화를 나누며 느낀 것은 그분이 가진 정신 세계가 저 티벳인들이나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에 매우 근접하다는 것이다. 그분의 얼굴 모습도 내가 여행 중에 만난 티벳인과 인디언들을 많이 닮았을 뿐 아니라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정신이랄까 존재 같은 것이 나로 하여금 그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몇 해 전 시애틀 추장을 비롯해 여러 인디언들의 연설문을 모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출간했을 때도 가장 많이 그 책에 대해 언급하신 이는 스님이셨다. 아마도 스님이 늘 강조하고 스스로 실천해 오신 것은 무소유한 삶의 지혜로움일 것이다. 물건이든 일이든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어지라는 것, 그 대신 자기 자신의 존재와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지라는 것, 하나가 필요할 때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가지면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는 것...... .
북인도 라다크 지방에 사는 티벳 노인 뙤마는 말한다. '나는 바깥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식탁과 의자와 카펫을 갖고 편안하게 산다고 들었다. 쌀과 설탕 등 행복에 필요한 모든 걸 갖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짬파(보리떡)와 툭파(죽)밖에는 먹을 게 없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사실 나는 이가 다 빠져 많이 먹을 수도 없다. 보다시피 당신들은 좋은 옷을 입었지만 내 옷을 누더기다. 그런데도 바깥 세상에는 많은 불행이 있다고 들었다.'
서양 기자가 그 불행의 이유에 대해 묻자 가난하되 지혜로움을 잃지 않은 뙤마 현인은 말한다. '아마도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아 버려 당신들은 기도하고 명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당신들이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는 주는 것보다도 당신들로부터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오타와 족 인디언 검은 새(블랙버드)는 말한다. '나는 무엇보다 나 자신과 만나고 싶다. 우리 인디언들은 삶에서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더 많은 물건, 더 큰 집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겨울 햇살 속에 날아다니는 마른 잎과 같은 것이다.' 검은 새는 또 인디언들의 생활 방식에 대해 '우리는 매순간을 충실하게 살고자 노력했으며, 자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우리가 들판의 한적한 곳을 거닐면서 마음을 침묵과 빛으로 채우지 않으면 우리는 갈증난 코요테와 같은 심정이었다.'고 고백한다.
굳이 티벳 현자와 인디언 노인의 말을 들추지 않더라도 인간의 고귀함과 삶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우리는 감지한다. 그런데 삶의 여정에서 어느샌가 본질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우리의 삶을 채워 버렸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매우 필수적인 것이라고까지 여기게 되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많은 영적 스승을 접하고 여러 명상 센터를 순례했다. 그 도중에서 내가 깨달은 것은, 참된 스승은 우리에게 지식이든 에고든 무엇을 더 보태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갖고 있는 것마저도 최대한으로 버리라고 요구한다는 점이다. 어떤 것에도 스스로 소유당하지 말며, 자신의 삶을 살되 삶에 휘둘리지 말라고 그 스승들은 일깨운다.
더 나아가 그 스승들은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신발 하나, 숟가락 하나까지도 최소한의 물질 속에서 최대한의 자기 존재를 누린다.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그들로부터 속속들이 배울 수 있다. 그들은 하찮은 소유물에 소유 당하지 않는 기상, 삶을 천박하고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무소유한 삶, 자신을 되짚어 보고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삶, 고구마 하나까지도 오두막 근처에 내려오는 산짐승들과 나눠 먹는 삶, 그리고 저녁이면 문득 등불을 마주하고 앉는 여유로운 삶,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스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오늘 내가 머리 깎고 출가해서 스님의 제자가 되지도 않았고, 그분으로부터 어떤 이름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나 스스로 그분의 속가 제자인 양 그 삶을 바라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 류시화의 '스님의 말씀을 책으로 엮으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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