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초충도 / 이인주

문근영 2008. 11. 14. 01:40

                                                                                         

민들레문학상 수상작

 

 草蟲圖  / 이인주   

 

    
  풀잎 아래 몸을 누인다 뼈 없는 통증이 편안하다 난생의 벌레인 나는 늘 웅크린 자의 등을 기억한다 내게 익숙한 모든 것들은 주름진 마디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그랬고 애인이 그랬고 생각이, 말이 그랬다 직립을 꿈꾸었으나 접히지 않을 만큼 독하지 못했다 낙오자로 채색된 길을 굼실굼실 기는 종족, 수풀 아래 버려진 울음이 온밤을 적시도록 적막은 한지처럼 흔들렸다 캄캄한 먹물을 쏟아내어 울음을 그렸으나 여백 한 점 들키지 못했다 풀뿌리를 닮은 말들이 자꾸만 지하로 뻗어갔다 온몸으로 캄캄한 자에게 밝음이란 말은 상상화다

 

 내 안에서 이슬방울로 맺히는 한 세계를 순백의 경험인 듯 바라보고 있었다 버려진 것들끼리 기댄 풍경이 진저리치도록 아름답게 익어갔다 아늘아늘 부푼 나는 그 작열 속에 나를 풀었다 그대로 한 마리의 벌레인 나, 어떤 앵속도 접근하지 못했다 껍질을 쓰고도 앉은뱅이 풀과 즐겁게 내통했다 잠자리며 산실인 그녀가 내게 산차조기와 사마귀의 붉고 푸른 비밀을 귀띔해 주었다 커다랗게 버려진 것들만이 건널 수 있는 강과 바람과 그 너머에 자리한 솔숲의 향기까지, 그때 처음 태어나는 말들이 흰빛으로 그려졌다 눈을 감고도 환한 세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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