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연잎, 문근영
입력2020-07-14 10:00
연잎
문근영
살랑거리는
연못의 마음
잡아
주려고
물 위에
꽂아놓은
푸른 압정
[태헌의 한역]
蓮葉(연엽)
淵心蕩漾(연심탕양)
欲使靜平(욕사정평)
水上誰押(수상수압)
靑綠圖釘(청록도정)
[주석]
* 蓮葉(연엽) : 연잎.
淵心(연심) : 연못 한 가운데, 연못의 마음. / 蕩漾(탕양) : (물결 따위가) 살랑거리다.
欲使(욕사) : ~로 하여금 …하게 하다. 여기서는 ‘使’ 뒤에 ‘淵心’이 생략되었다. / 靜平(정평) : 평정(平靜). 고요하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水上(수상) : 물 위. / 誰押(수압) : 누가 눌러두었나?, 누가 꽃아 두었나?
靑綠(청록) : 청록 빛. 푸르다. / 圖釘(도정) : 압정(押釘)의 중국식(中國式) 표현. 그림 따위를 고정시키기 위한 쇠못이라는 뜻이다.
[직역]
연잎
연못의 맘 살랑거려
고요하게 해주려고
물 위에 누가 꽂았나?
푸른 압정!
[한역노트]
바람에 살랑거리는 수면(水面)을 연못의 마음으로, 수면 위에 납작 엎드려 있는 연잎을 그 마음을 잡아주는 압정(押釘)으로 비유한 이런 동시(童詩)는 주된 독자인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유쾌하고 즐겁게 하기에 충분할 듯하다. 그리고 “살랑거리는 연못의 마음”이라는 시구(詩句)는 자연스레 ‘사람의 흔들리는 마음’으로 생각의 무게중심을 옮겨가게 한다.
연못과는 비교도 안 되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호수(湖水)에서 무시로 흔들리는 우리들의 마음은 무엇으로 잡아주어야 할까? 압정은 일종의 못인지라 아무래도 따끔거릴 테니 무엇인가 묵직한 것으로 눌러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예로부터 무엇인가를 눌러두는 돌을 ‘누름돌’로 불러왔다.
역자에게는 특별한 추억이 담긴 누름돌이 있다. 그것은 할머님이나 어머님이 김치 독 안에 눌러두신 그 누름돌이 아니라, 작은 누나가 메모를 한 종이 위에 얹어두었던 애들 주먹만한 크기의 누름돌이다.
“어느 들로 와라.”
작은 누나가 갱지(更紙) 연습장에 색연필로 이 글을 쓰고는 마당 가운데다 두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얹어두었던 어린 시절의 그 누름돌! 당시에 작은 누나는 중학생이었고 역자는 초등학생이었다. 집에 가기가 싫어, 정확하게는 들에 일하러 가기가 싫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어느 산자락 묘소 상석(床石) 앞에 엎드려 읽느라 중학생인 누나보다 귀가 시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누나가 부모님을 따라 동생들과 들에 가면서 그 메모를 내게 남겨준 것이었다. 누런 갱지 위에 올려져있던 그 돌 역시 누름돌이라는 걸 안 건 한참 뒤의 일이었지만, 그 누름돌은 당시의 역자에게는 그냥 슬픈 돌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돌만 없었어도 종이가 날아가 버려 가기 싫었던 들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옛날에 역자가 가기 싫어 땅만 내려다보며 타박타박 걸었던 좁은 농로를 마지막으로 밟아본 것이 언제인지 아득하기만 하여도, 지금에 부끄럽고 죄스러운 그 때의 기억은 아직까지 또렷하기만 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생각뿐만 아니라 일이나 삶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필요한 존재가 누름돌과 같은 친구가 아닐까 싶다. 내가 바람 앞의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을 때 누름돌이 되어줄 친구가 없는 경우보다 더 슬픈 순간이 또 있을까? 누름돌이 없는 독 안의 김치가 오롯하게 익어갈 수 없듯, 누름돌이 없는 사람의 마음자리 역시 온전하지 못해 군데군데 상처로 얼룩지게 될 듯하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세상이 흔들릴 때는 또 어찌해야 할까? 지진보다 더 아찔하게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의 친구가 되어 누름돌이 될 사람은 누구일까? 그런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세상은 여전히 흔들리는데 어두운 눈에 누름돌은 보이지 않으니, 백면서생(白面書生)인 역자는 오늘도 그저 갑갑할 따름이다.
역자는 4연 7행으로 된 원시를 4구의 사언고시(四言古詩)로 재구성하였다. 이 한역시의 압운자는 ‘平(평)’·‘정(釘)’이다.
2020. 7. 14.
강성위 한경닷컴 칼럼니스트(hansh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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