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창(영남대 독문과 교수)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른 유명한 가수 밥 딜런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미국 가수들 가운데 당신처럼 노래에 어떤 메시지를 담아 노래하는 가수는 얼마나 됩니까?” “아, 약 136명쯤 됩니다.” “아니, 136명쯤이라니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36명에서 142명쯤 됩니다.” 그제서야 그 기자는 머쓱해서 입을 다물었다. 몇 년 전 인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을 때 전국대학인문학연구소협의회가 주최한 학술대회의 주제는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와 생산성’이었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인문학 전공자들이 모여 ‘인문학도 따지고 보면 돈이 되는 학문’임을 애써 강조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인문학의 가치를 경제학의 패러다임에 대입시켜 ‘인적자산’이라는 개념으로 계산서를 뽑아내려는 시도가 나로서는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처럼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그럼 철학 한번 해봐, 실시!”
인문학이나 교양이란 물질적 재화나 상품처럼 돈으로 따질 수 없고, 교육은 인적자원의 수요 공급과는 차원이 다른, 인간 대 인간의 총체적 접촉과정이라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인문학의 경제적 가치를 따지는 것은 쌍팔년도에 논산훈련소를 무대로 벌어지는 소극을 보는 것처럼 안쓰럽다. “야, 너 뭐하다 왔어?” “대학에서 철학을 했습니다.” “그럼 철학 한번 해봐, 실시!” 허기야 재벌이 기업뿐만 아니라 대학과 신문과 병원을 직접 운영하고, 대부분의 국민이 건설업체 이름이 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세상이니 모든 것을 상업적 이해타산에 맞추어 계산하고 수치로 표시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니 노조가 파업을 하면 그로 인한 손실액이 얼마라고 즉각 계산서가 나오고, 지율 스님이 천성산 도룡뇽을 살리자고 단식을 하면 건설비 손실이 얼마라고 돈의 액수로 입을 틀어막는다. 그런데 이런 식의 계산과 수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확한 계산법이나 근거는 밝히지 않고 엄청난 피해액만 강조한다는 점이다. 계산법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니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못내는 고차원적인 계산에 의해 산출한 수치니까 무조건 믿으라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수치를 들이대면 기자, 교수, 정치인 등 이른바 전문가들도 무조건 수긍하고 이런 수치를 인용하기 때문에 저절로 권위가 생기는 이점이 있다. 가령 대학의 전공과 직업의 일치 여부를 따지는 ‘전공상관성’이라는 수치를 보자. 이 수치는 주로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이 졸업 후의 직업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학교육의 비현실성을 비판하는 근거로 인용되곤 한다. 특히 최근에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의 경영진이 대학의 구조조정을 위한 근거로 이것을 써먹는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걸핏하면 이 수치를 들이대며 대학교육의 비효율성을 비판한다.
계산할 수 있는 것이라도 제대로 계산한 걸까?
그런데 이런 수치가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이 세상의 모든 직업에 일치하는 전공이 대학에 설치돼 있어야 한다. 농부나 어부, 청소부, 광부, 운전기사, 가정주부가 모두 대학의 해당 학과를 나올 수는 없으므로 이 수치는 이른바 전문직에만 적용되는 원천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정치학과 출신은 몇이나 되는가? 그리고 이런 기사를 쓰는 기자 가운데 신문방송학 전공자는 몇 %나 될까? 최근에 서울의 한 대학에서는 인문학 전공을 통폐합하는 구조조정을 강행하자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학교 공사장 크레인과 한강 철교에 올라가 시위를 하는 등 노사분규 현장에서 익히 보아왔던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그러자 학교 당국은 해당 학생들에게 퇴학 등 중징계를 내리면서 학교 이미지를 실추시켰다고 2천 5백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학생을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등록금 얼마씩을 내는 단순한 인적 자원으로 보는 비교육적 발상이고,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학교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처사가 아닐까? 우리보다 경쟁이 치열한 다른 나라에서는 왜 재벌이 직접 대학을 운영하기보다는 대학에 거액의 기부를 할까? 우리 기업인들이 걸핏하면 모범경영의 사례로 입에 올리는 일본의 한 기업체는 왜 ‘전혀 실용성이 없는 과제’로 한정하여 연구비를 지원할까?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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