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부문 설하한 씨
2019 한경 신춘문예에서 시 ‘물고기의 잠’으로 등단한 설하한 씨는 “시를 쓰고 나면 항상 즐겁다”며 “읽은 이들이 즐거워할 수 있도록 또렷하고 강렬한 목소리를 내는 시를 쓰는 시인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설씨는 스무 살에 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시를 접했다. 그는 “그때만 해도 시에 대해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았다”며 “스물한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니 그저 멋모르고 썼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그가 느낀 ‘시’와 ‘시인’의 모습은 풍류를 즐기는 이들의 이미지였다. 막상 시를 쓰기 시작해 보니 엄청난 정신노동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택배 물류창고와 공사판에서 일하며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에 더 익숙한 삶을 살아왔던 그였다. 그럼에도 시를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설씨는 “쓸 땐 힘들지만 쓰고 나서 항상 즐거웠다”며 “원래는 막연히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글을 쓸 때 느끼는 감정이나 마음 상태에 있어서 시가 주는 밀도가 더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누구보다 시 한 편을 창작하는 데 많은 품을 들여왔다. 평소 시집도 많이 읽었지만 깊게 사유해보고 싶어 가장 좋아하는 신화 관련 책은 물론 한 장 넘기기가 어려운 철학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 한 편을 쓰는 데 길게는 두 달 가까이 걸렸다. “시를 읽으면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쓸 때는 마치 생각의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아 좋고요. 그저 계속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가 꿈꾸는 자신의 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설씨는 “짜임새가 잘 갖춰진 시도 있지만 시에서 강렬하게 튀어나오는 목소리를 많이 내는 시를 썼으면 좋겠다”며 “구성이나 단어에서 나오는 리듬감을 살린 음악적인 시도 써보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시집 한 권 살 가격이면 짜장면 두 그릇을 먹을 수 있어요. 배고픈 이들에겐 대단한 가치죠. 짜장면 두 그릇도 되지 못하는 책을 내선 안 되지 않겠어요? 설령 짜장면 한 그릇 정도의 가치를 갖지 못하더라도 읽은 게 아깝지 않은 시를 썼으면 좋겠습니다.”
■당선 통보를 받고
"세계를 다른 리듬으로 구부릴 수 있는 詩 쓰고 싶어"
당선되면 기쁠 줄 알았다.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 버린 것 같다. 선진국에서 소비하는 일이 후진국을 착취하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엉망으로 취하는 날이 많고 생활을 바꾸려 하진 않는다. 당선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나다. 나는 무언가 비틀린 것 같다. 관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적당히 살다 죽고 싶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무언가를 먹을 것이고, 차지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세계를 조금 구부려보려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세계가 다른 리듬 쪽으로 조금은 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믿어보기로 한다. 누구를 위한 예의이고 누구를 위한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내 예의이고 최선인 것 같다.
좌절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 나 말고도 누군가가 쓰고 있다는 것, 읽고 있다는 것. 이런 사실이 글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도왔다.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는 글에도 세계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구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족한 시를 좋게 봐준 심사위원님들과 지면을 내어준 한국경제신문사에 감사드린다. 글을 읽고 쓰는 이들에게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지금까지 내 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앞으로 내 시를 읽어줄 가족, 친구, 독자, 선생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첫 독자였고, 앞으로도 첫 독자일 애인에게 감사를. 그리고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새해가 모든 사람에게 안녕하길 빈다.
설하한(본명 구본승) 씨는 △1991년 서울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문예창작전공 석사 수료
■심사평
유안진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문학관 관장
이재훈 시인·현대시 주간
왼쪽부터 손택수·유안진·이재훈 심사위원.
응모작에서는 시의 잠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시는 한마디의 잠언을 위해 수만 마디의 시적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체적 일상과 실존의 경험을 통한 살아 있는 이미지, 사물을 바라보는 번뜩이는 눈,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신인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본심에서 오랜 숙고 끝에 최종적으로 설하한, 신진숙, 이주호가 남았다. 이주호의 ‘빙붕공항’은 매력적인 작품이다. ‘펭귄’은 지금 우리 사회 청년들을 가장 적확하게 은유하면서 빙하를 향해 날아오르는 비상의 욕망을 발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슷한 착상의 기성 시가 몇 편 있다는 점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신진숙의 ‘ㅁ이 자라 ㅂ이 되도록’은 발상이 새로웠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