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정형시학 시조 신인상 당선작]
■ 어느 시비(詩碑) 앞에서 외 2편 / 천유철
■ 해토머리 씨눈 트기 외 2편 / 전제진
■ 민들레 어머니 외 2편 / 윤정
어느 시비(詩碑) 앞에서 / 천유철
한 시인의 노랫가락
바람 같고 구름 같다
춤꾼의 살풀이는
강물 같고 바다 같다
누구냐 이 한밤 꿈을
돌에 새겨 세운 이는.
슬픔이 지나가다
돌을 만나 내는 소리
절망도 졸졸 흘러
여울로 가는 소리
눈물도 단장(斷腸)의 아픔
희망 대신 적힌다.
아무리 어려워도
굽히며 살긴 싫다
돌에도 피가 돌아
저리 고이 여무는 일
아득한 역사 앞에서
나는 돌로 누웠다.
도마소리
저녁이면 집집마다 가슴 저민 도마소리
몇몇 식구 위해 칼질하는 그 모습은
언젠가 영화에서 본 파종하는 작업 같다.
한평생 남은 일은 썰어내는 오직 그 일
스쳐간 상처들이 물구서는 부엌에서
칼끝이 스친 자리에 새 아픔이 자라난다.
결 고운 가지마다 싹이 트고 잎이 돋듯
부지런한 칼질 소리 한 슬픔을 도막낸다
입 벌린 자식들 위해 정도 한도 추려낸다.
이 한 몸 다 주어도 그 무엇이 아까우리
아파오는 설움으로 생채기 다듬는 모정
평생은 시름의 등불 지금 훨훨 타고 있다.
섬
섬으로 가는 배는 여지없이 만원이다
잠에 취한 사람들은 고치처럼 오그리고
찬바람 꿉꿉한 짠 내 머리칼을 물들이네.
어둠 거친 선착장에 단 입김이 쏟아지고
서리 내린 들판 위로 잔기침이 날아든 아침
낯 들어 기지개 켠다, 섬이 품은 시간들.
바위 등 고둥처럼 깎아지른 섬마을엔
구멍 난 팔꿈치 깁듯 테이프로 꿰어 맨 창틀
헐렁한 자물쇠 속에 지나간 시간 담겨있네.
종기 난 바람벽을 시멘트로 다스려도
세월 앞에 담백하고 황홀하게 농익은 몸
자연은 본능적으로 몸에 시간을 새겼구나.
해토머리 씨눈 트기 외 2편 / 전제진
뒤채이고 등 떠밀린 풀빛 띤 한창 나이
성마른 날빛 앞에 주눅 든 눈꽃처럼
얼녹다 점점 시들어 눈길 밖에 나있다
고해 바닥 자맥질하다 내뿜는 숨비 소리
눈높이 낮추어도 닿지 못할 거리인가
비정규 느꺼운 일손 시린 입술 깨문다
씨눈 트기 기다리는 나볏한 몸짓으로
가증스레 켜로 쌓인 노을빛을 삼켜댄다
오! 저런 협기를 물고 연막 속을 헤쳐 가는
어떤 은유
고개 든 물뱀처럼 굽이쳐 가는 냇물
징검돌에 부딪치며 거품을 게워낸다
날빛이 풀숲에 걸려 허둥대는 25시*에
구렁으로 빠져들 듯 내닫는 발걸음도
한 짬의 유예 없이 헛되게 내몰린다
못다 푼 기나긴 설화 실타래에 감기고
풀빛을 금쪽같이 아끼라는 풍자인가
거먕빛 하늘 가녘 동살 밝힌 붙박이별
수심 속 어둠을 건져 군불을 지펴준다
* 루마니아 소설가 게오르규 소설에 나오는 절망과 불안의 시간
파도, 다듬질하다
이골 난 방망이질 구진 옷감 펼쳐내듯
구부러진 사람 속내 판판하게 고르려고
파도는 철썩거리며
애면글면해댄다
밀물 따라 밀려드는 물이랑을 헹궈내고
썰물 때 숨을 돌려 암초 더미 내뱉고는
가슴속 후련하던가
깃을 접고 조아린다
모래톱에 전 땟국도 흰 거품 뿌려가며
솟구치다 두드리고 울부짖다 얼싸안는
온종일 피맺힌 노역
해거름이 다독인다
민들레 어머니 외 2편 / 윤정
하이얀 머리카락
고옵게 나 먹은 표*
뱅그르 날아 올라
가벼웁게 하늘하늘
손주들 마중하시나
대문 앞 서성인다.
모퉁이 돌아가면
문패 없이 지은 집에
제 한 몸 뿌리 내려
살림을 일궈내고
할미꽃 말벗이 되는
고향집 뜨란의 꽃,
햇볕에 따가웁던
봄날을 다 보내고
목백일홍 붉게 타는
한여름에 시들어도
빈 들녘 이랑 틈 사이
일편단심 묻는다.
* “곱게 나이를 먹은 표시가 있어야 한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할머니식 표현.
향수
맑은 날 구름 따라 배낭을 짊어지고
꽃 보며 오르내린 부모 산 둘레길에
목청껏 불러본 이름 메아리로 돌아온다.
메추라기 선하품에 아카시 숲이 깨고
추억만 곤히 잠든 사진 한 장, 툭 떨진다
달개비 속눈썹이 자라듯 깊어가는 여름날
수탉이 타고 노는 빨랫줄 그림자에
손금을 주름잡고 나비가 날아든다
봉숭아 꽃물 들인 손 팔랑팔랑 춤추며
그리움 천 리 쌓은 추풍령 넘어선다
맑은 고을 푸른 산성* 병풍처럼 펼쳐지면
산마루 뛰어다니며 아이처럼 춤춘다.
버들이 허리춤에 고무줄을 매어놓고
깜박잠 깨고 보니 팥죽이 익어간다
한 해를 쓸어 담으며 마당비를 세운다.
* 충북 청주시의 우암산 상당산성.
하루의 가감승제
집 앞에 벚나무에 까치를 불러놓고
등굣길 서두르신 어머니 정 더하기로
아이들 늦잠을 깨워
하루를 열게 한다.
일회용 종이컵과 깨진 병 어지른 길
서로가 봉사하고 오가는 정 나누며
시장통 골목 사이로
꽃 그림자 퍼질 때,
아버지 숙직근무 곱하기한 밤을 건너
하품이 이어지고 눈 그늘이 길어져도
온종일 기다려지는 촛불 켠 저녁 풍경
행복로 47번 길, 감귤 빛 조명 들여
식구들 마주 앉아 하루를 기록한다
말없이 가시를 빼놓고
사랑 한 술 뜨면서.
<심사평>
시를 쓴다고 돈이 되는 건 아니다. 돈이 안되니 빵이 나올 리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자면 시는 세상살이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지 모른다. 그러나 그 쓸모없음이 정작 시의 씨앗을 물고 있음에랴. 시 쓰기는 쓸모없음의 쓸모를 찾는 데서 출발한다. 시의 낯섦과 새로움이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예화는 『장자』「인간세편」에 나온다.
회를 거듭할수록 『정형시학』 신인상도 열기를 더한다. 무엇보다 응모 작품 수의 증가가 이를 증명한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만 해도 열한 사람에 예순 편을 웃돈다. 투고 열기만큼이나 심사 열기 또한 뜨겁다. 표현의 참신함을 비겨보고, 역량의 무게를 달아보고, 작품의 완성도를 따져본다. 정독과 숙고의 시간이 지난 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에 남은 작품은 천유철의 「어느 시비(詩碑) 앞에서」외 2편, 전제진의 「해토머리 씨눈 트기」외 2편, 윤 정의 「민들레 어머니」외 2편이다. 이들 작품이 보여주는 역량은 선뜻 앞뒤를 가리기가 힘들다. 고심 끝에 세 사람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낙점한다. 그 동안 신인상 배출에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염결성을 지켜온 『정형시학』으로선 하나의 파격이 아닐 수 없다.
당선작들은 시종일관 견자의 시각으로 당대 삶의 정서에 밀착한다. 생존의 안팎을 넘나들며 혹은 쑤석대며 관심의 영역을 넓혀간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 다잡은 경험의 세목들을 시조 3장에 녹여내고 있다. 그러나 세 사람이 추구하는 작의의 방향이나 결구의 방법은 확연히 다르다. 이는 저마다의 개성이 그만큼 뚜렷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자연이되 그것이 곰삭은 삶의 표정과 결속되고, 인간이되 또 그것이 엄연한 생존의 풍경과 유리되지 않는 것이다.
천유철은 정제된 율격에 무리 없는 시상의 전개가 강점이다. 그런 자세로 저녁 부엌의「도마소리」를 듣고, 뱃길 저편의 「섬」을 찾는다. 「도마소리」가 “가슴 저민” 것은 그 소리가 “한 슬픔을 도막내”는 까닭이다. “칼끝이 스친 자리에 새 아픔이 자라나”는 “모정”은 “한평생”을 “썰어내는 오직 그 일”이 아니던가. 「섬」은 섬과 섬사람들의 시간을 좇는다. “구멍 난 팔꿈치 깁듯 테이프로 꿰어 맨 창틀”에서 그들이 영위하는 녹록지 않은 삶의 실상을 본다. “섬이 품은 시간들”은 “헐렁한 자물쇠 속에” 담겨 있다. 섬의 시간은 곧 몸에 새긴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들은 “어둠 거친 선착장에 단 입김”을 쏟는다. 「어느 시비(詩碑) 앞에서」는 관조의 시각이 두드러진다. “슬픔이 지나가다/돌을 만나 내는 소리”를 듣는 귀. 그 귀는 몸 아닌 사유의 귀다. 그것이 “돌에도 피가 돌아/저리 고이 여무는” 성찰을 일깨운다. 시인의 생에 대한 긍정이 “아득한 역사 앞에서” 스스로 “돌로” 눕게 한다. 천유철의 따뜻한 시선은 대상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동화한다. 그만큼 공감의 폭이 넓다.
전제진의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는 생존 현장에서 얻은 우의다. 자연의 심상을 문면에 끌어들여 삶의 풍경을 에두르는 것이다. “성마른 날빛 앞에 주눅 든 눈꽃”, “거먕빛 하늘 가녘 동살 밝힌 붙박이별”에서 보듯, 묻혀 있는 우리말의 쓸모를 찾아 너볏한 용례를 보여준 것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시어를 고르고 앉히는 시인의 기본 자질을 보여주는 일이다. 「해토머리 씨눈 트기」의 배경은 제목 그대로 “해토머리”다. 땅은 녹아서 풀리건만 “풀빛 띤 한창 나이”는 “뒤채이고 등 떠밀”릴 뿐, “눈높이 낮추어도” 닿을 데가 없다. 청년실업 문제, 간과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매몰되어서도 안된다. 그것이 “고해 바닥”에서도 “씨눈 트기”를 기다리며 “협기를 물고 연막 속을 헤쳐 가는” 이유다. 끝내 희망의 전언을 포기하지 않는 이러한 시작 태도는 「어떤 은유」와 「파도, 다듬질하다」에도 이어진다. “수심 속 어둠을 건져 군불을 지펴주”고, “모래톱에 전 땟국도 흰 거품 뿌려가”는 것이다. 특히 “밀물 따라 밀려드는 물이랑을 헹궈내고”처럼, 성대의 진동을 수반하는 울림소리(ㄴ, ㅁ, ㄹ, ㅇ)의 겹침으로 운율을 강조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윤 정의 작품은 이 땅의 내림정서인 순정한 모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태 묻은 땅과 육친에 대한 애틋함이 문면의 서정성을 높이고 있다. 쉬운 말과 낯익은 정서가 만나 정감 어린 감성의 발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민들레 어머니」와 「하루의 가감승제」가 사모곡이라면, 「향수」는 망향가다. 「민들레 어머니」의 무대는 “모퉁이 돌아가면/문패 없이 지은 집”이다. 민들레는 그 집, 그 고향집 “뜨란의 꽃”. “제 한 몸 뿌리 내려/살림을 일궈내고”, ‘빈 들녘 이랑 틈 사이/일편단심을 묻는” 존재는 민들레인 동시에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의 일상은 「하루의 가감승제」에서 한층 구체화된다. “아이들 늦잠을 깨워/하루를 열”고, “촛불 켠 저녁 풍경” 속에 또 하루를 닫는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는 “말없이 가시를 빼놓고/사랑 한 술 뜨면서” 속절없이 사위어간다. 이 작품은 그런 어머니의 절대 헌신에 바치는 하나의 헌사로 읽히기도 한다. 「향수」는 “메추라기/수탉”, “달개비/봉숭아” 같은 낯익은 이름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아련한 고향집의 정취를 자아낸다. 그 말 못할 그리움 속에 고향집의 사계가 전경화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김태수, 신승민, 정병기, 오경탁, 홍재선, 김숙희, 최종길, 박용진의 작품이 본심에서 거론되었음을 밝힌다. 어련무던하다면 어련무던하고, 어금버금하다면 어금버금하다. 개중에서 하기 나름으로는 시조단의 젊은 피가 될성부른 신승민의 작품에 대해 한마디 덧붙인다.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정격 형식에 반해, 고투로 일관한 내용이 문제다. 현대시조의 ‘현대성’에 부합하는 과감한 인식의 전환을 주문한다.
- 심사위원 : 윤금초, 유재영, 박기섭(글)
*예심 : 조성문, 임채성, 장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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