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시흥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한휼
대상
털실이 풀리는 저녁 / 한휼
하루 종일 감긴 저녁의 내부는 단단하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감는다 죽은 바퀴벌레를 삼키는 고양이 울음소리 뻐거덕거리는 회사의자와 숙취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와 텅 빈 가죽지갑까지, 무엇이든 감아 표면을 둥글게 만든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뜨개질바늘처럼 늘 아버지의 어깨에 꽂혀있다
고양이가 털실을 가지고 노는 저녁은 위험하다 아버지의 올이 풀리지 않는다면 고양이는 맛있는 고양이 스튜가 될지도 모른다 발톱이 빠질 때까지 닫힌 방문을 박박 긁는 것은 괜한 짓이다 발톱이 털실뭉치 속에 박히기라도 하면 그것도 큰일이다 단단한 털실에 턱을 괸 채 밤새 무서운 꿈을 꿔야 한다 몸을 뒤척이다가 고양이 수염이 털실의 눈알을 찌르기라도 한다면, 그때 탈구된 털실의 내부가 털실 바깥으로 튀어나와 벽시계가 멈추기라도 한다면,
털실을 요리조리 드리블 하기 위해 고양이의 발톱은 초저녁부터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다 누가 이토록 단단하게 감아놓았나 털실뭉치 깊숙이 파고든 털실의 끝을 찾을 수 없다 털실의 끝을 잡아당겨야 털실 맨 안쪽에 도사리고 있는 아버지의 미간을 펴줄 수 있을 텐데
털실이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동그랗게 감긴 저녁, 고양이가 발끝으로 털실 아래쪽을 툭, 건드려본다 뭉툭한 앞발로 윗목에서 아랫목으로 굴릴 때마다 아버지를 감았던 털실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소매 끝이 풀리자 아버지의 손목시계가 9시 정각을 알린다 뉴스 속 가장들이 한 올씩 풀려 나온다 사고뭉치들은 대부분 털실뭉치들이다 화면이 끓어오르고 털실은 계속해서 라면처럼 풀려나간다
털실이 다 풀려버린 아버지의 어깨와 쇄골이 앙상하게 드러난다 어머니가 뜨개질바늘로 고양이의 붉은 털옷을 짓는다 고양이 발톱이 고양이를 밀고 고양이 바깥으로, 빨치산처럼 몰래 빠져나온다
우수상
각(刻) / 조경선
1.
꽃은 피는데 내가 살지 않은 봄이 온다
나는 지상에서 나무 깎는 노인
나무들은 우뚝 나무로만 서서 한 생을 탕진하는데
우듬지만이 까마득하다
둥지 잃은 새들이 잘린 그루터기에 맴돌아도
나무가 나에게 걸어오는 시간 따윈 묻지 않는다
저 깊숙한 울음까지 새길 수 있을까
환지통을 참으며 나무가 말라갈 때
바람이 무딘 손금을 부추긴다
나무가 모르는 방향에서 칼을 고른다
첫 날(刀)은 표피만 살짝 건드려야 한다
작은 숨소리만 들려도 칼을 뱉어내니
이겨내선 안 된다
무중력 상태까지 나를 놓치며 결을 따라 흘러야 한다
깎아내면 깎아낼수록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나무의 본색(本色)
그때 나무가 칼을 선택한다
살을 내주며 나무가 나를 길들인다
모르는 형상(形象) 안에 칼은 갇히고
끝내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다
나무의 얼굴을 꺼내며 없는 봄을 탕진한다
2.
잘려진 밑동이 다시 잘려 나간다
내력이 둥글게 말리고
날을 삼킨 결이 암호로 풀어진다
또 한 생을 절단 내는 순간이 온 것이다
오래된 내 상처가 목장갑 안쪽에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관을 주문한 자가 죽어서 관을 기다린다
그가 말한 먼 훗날은 그리 먼 때가 아니었다
먹선을 튕기면 끌은 정교해지고 망치는 거세진다
나무속을 파내는 일이란 불편을 깎아내는 일
그의 체온과 진지한 몸짓을 생각하며 틀을 짠다
막무가내로 박혀있던 울음소리를 걷어낸다
수십 겹의 울음이 뭉쳐져 있다가 풀어진다
그에게 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여백엔
울음 따윈 없어야 한다
겨우 여섯 개의 판자가 생을 요약한다
뚜껑을 만들기 전 숨을 고른다
관을 닫을 때 어둠에 눌리지 않아야 한다
가만히 관에 누워 본다
완전한 처음, ‘내 나무’의 완성을 본다
우수상
트러블 메이트 / 강경아
구부러지기 쉬운 말들의 행방을 구름에게 따질 필요는 없어. 바싹 구워진 자음과 모음은 크래커의 부스러기처럼 번번이 흘리길 좋아하지. 바람의 구둣발 앞에선 일제히 모르쇠로 돌아 서 있으면 괜찮을 거야. 비대칭 언어들의 질주가 오선지 위에 걸릴 때면 한 옥타브씩 지워지는 너의 허밍소리가 그리워 질거야. 정말 괜찮은 거니. 파열음이 쏟아지는 블랙박스 속에서 사잇소리처럼 끼어들기 좋아하는 일인칭 언어들, 그 낄낄대는 된소리의 일방적 좌담들, 한 수 거들지 않아도 비공식적으로 우리는 하나.
우리, 우리, 울타리는 뛰어 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말했지. 걸려 넘어져도 뛰어 넘어서야한다고 방점을 찍으며 강조할 땐 말라붙은 감정이 움찔거렸지. 눈물 같은 건 방울방울 굴리기 쉬워 걷어 차버리면 그 뿐이라고, 카푸치노의 거품처럼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언어들에 대해, 휘~ 휘~ 저어 버리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해, 기호에 따라 시시때때로 입맛이 달라지는 표정들이 골똘하게 다가오는 저녁이야.
안녕, 프렌즈.
우수상
플레이밍* / 지연(김지연)
옷을 겹으로 입어도 춥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컴에 들어간다 검지에 매달린 눈들
붉은 눈들이 동동 떠서 당구를 친다
회사에서 잘렸다 아파트 이자 낼 돈이 막막하다
분노는 쓰리쿠션
온탕 속에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외면당하며 스친 눈알들이 멈칫
제 눈알을 검지 큐대로 날린다
살아있는 것들은 제 눈알이 받은 충격만큼
회전시킨다 담배를 꼬나물고 쓰발
창밖에 눈발처럼 날리는 진눈깨비
휘둥 녹으며 곤궁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몸을 튕긴다
춥다는 천개의 손 천개의 눈
알몸 같은 욕설들
플라스틱 웃음과 울음 사이
문지르거나 확대하거나 벗기며 벗어진다
검지에 달린 눈이 모락모락 춥다
누군가 나를 친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혈관 터진 눈이 굴러가고 있다
* flaming: 인터넷에서 플레이밍은 공공연히 누군가에게 심하게 빈정대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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