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벌열
강 명 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정조는 알려진 바와 같이 유능한 군주였다. 『정조실록』과 『홍재전서』을 읽어보면, 그가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책에는 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그가 제안했던 수많은 정책이 실려 있다. 그 정책은 우리가 통칭 실학이라고 하는 것과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정약용의 여러 개혁적 아이디어와 정조의 정책을 비교해 보아도, 그 거리는 아마도 크지 않을 것 같다. 요컨대 정조의 정책은, 조선시대 양심적 지식인의 애민의식이 도달할 수 있었던 최선의 경지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정조의 정책은 최선이라 평가할 만했지만
정책은 정책일 뿐이다. 정책은 종이 위의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회 속에 실현되어야 정책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정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권력이 필요하고, 그 권력을 소유한 유일한 사람이 ‘국왕’ 정조였다. 정조는 과연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1800년 6월 정조가 죽자 이후 조선은 이후 1백 년 동안 가냘픈 잔명을 헐떡이다가 종국에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정조 이후 왜 이런 사태가 빚어지고 말았던 것인가?
『정조실록』과 『홍재전서』를 다시 읽어보면, 정조 당시에 이미 그의 정책이 먹혀들지 않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과거제도나 환정(還政)의 문란을 고쳐보려고 여러 차례 정책을 세워 집행해 보지만, 관료들은 명을 내릴 때만 듣는 시늉을 했을 뿐 이내 원래의 부패한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왕이 살았을 때도 이랬으니, 하물며 왕이 죽은 다음에랴! 그냥 모순과 부패의 직선주로를 내달렸던 것이다.
정조의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고,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는 홍봉한이다. 이 집안, 곧 풍산홍씨는 18세기의 벌열가문으로 워낙 유명한 집안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홍주원(洪柱元, 인조 연간, 부마)에게 닿는다. 홍봉한은 홍주원의 현손이다. 더 꼽자면, 18세기 말 19세기초의 관료이자 문인으로 이름을 날린 홍석주·홍길주·홍현주 삼형제, 홍양호 등도 모두 홍주원의 자손들이다. 이 가문의 관직 이력을 보면 참으로 휘황찬란하다. 정승 판서가 무더기로 나오는 것이다. 풍산홍씨 외에도 이런 가문이 다수 있었다. 잘 알려진 안동김씨, 풍양조씨, 연안이씨, 대구서씨, 반남박씨, 경주김씨, 연안김씨 등 서울에서 세거하는 십수 개의 벌열가문이 정조 당시 거의 모든 고위관직을 독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는 이들에 의지하여 정치를 해야만 하였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어떤 선택지를 뽑아도, 정조는 소수의 벌열 가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역적과 충신이 모두 이 집단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조의 즉위를 끝끝내 방해한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정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홍국영은 모두 같은 홍주원의 후손이었다. 정조가 반대하는 한쪽을 제거하고 나서 다른 쪽을 선택했다 한들 그 역시 벌열가문 출신이었을 뿐이다.
조선은 이미 소수 벌열에 의해 사유화되어 버리다
18세기 후반이면 조선은 이미 십수 개 벌열가문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국가는 그들의 것이 되었다. 소수의 벌열에 의해 사유화된 국가! 이것이 18세기 후반 조선의 진면목이었다. 국가를 사유화한 서울의 소수 벌열은 왕 역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정조 즉위 초기 정조를 암살하려 했던 여러 사건들은, 국가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왕이 아니라, 소수의 양반가문이라는 것을 스스로 천명한 것이었다.
벌열은 벌열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고, 왕의 이익이나 백성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중앙과 지방의 알짜배기 관직은 이들 소수 가문에 줄을 댄 사람들이 차지하기 마련이었고, 이들은 왕의 뜻이 아니라, 자기 주인집의 뜻을 받들었다. 정조는 홀로 용상에 앉아 소리를 지를 뿐이었으니, 서울에 터 잡은 귀족들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21세기 한국사회는 점점 살기 어려운 사회가 되어 간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고,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도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안다. 하지만 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오늘날도 조선을 사유화했던 소수의 양반가, 곧 벌열이 있는 것은 아닌가?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뜨자 별안간 정신이 아득하여 국민에게서 나라의 권력이 나온다는 이 개명천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별생각을 다 해 본다.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 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푸른역사, 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 소명출판, 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 길, 2006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소명출판, 2007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푸른역사, 2007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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