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작] 김석영
비의 전조
탁자 위 컵이 스러졌다, 쓰러진 순간부터 물의 시간을 세고 있었다
만지지 않아도 사라질 거니까
休止의 시간을 적시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채로 젖어서
천장까지 닿고 싶으니까
높이를 잃어버린 천장과 바닥을 잃어버린 컵
사이를 생각하다가
책 속에서 검은 물이 쏟아지면 방은 저녁이 될텐데
저녁에 누워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
어항이 될 텐데
컵이 쓰러지면서 시작되었다
나 물고기가 되었다
투명한 점선을 따라 천장을 접으면 사라지는 방
수영을 배운 적은 없지만 선의 근사치에 닿을 자신은 있는데
비와 물고기를 번갈아 떠올리다가
비는 점, 물고기는 선이라고 생각하다가
점을 한 방울씩 떨구다가
온 몸이 눅눅해지면 점은 입술을 잃을텐데
한쪽 벽에 부딪혔다 돌아오지 않고 선이 휜다
내가 가진 숫자를 다 세어도 물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바닥의 자세
젖었다 마른 종이처럼 얼굴이 당겨오고
벽지 속에서 메아리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
물고기의 기억으로 누워 구겨진 하늘을 바라본다
물의 뼈
비가 가지런한 두 팔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뛰어내린다
어둠의 안쪽을 긁어내는 소리가 난다
동그라미가 동그라미를 깨뜨리며
빗물은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리는 혀
비의 군락이 모여 숲을 이룬다
침엽의 뿌리가 굵어질 때 나의 바깥이 젖는다
내 안의 비늘들이 수면 위로 일렁인다
나는 비에게 기생하고 싶은 돌기
구멍이 난 몸에서 소용돌이치는 비명
젖은 새들이 몸을 웅크리며 떨다
뼈와 뼈가 닿아 달그락거리며 퍼져나가는 파문
비에서, 늘 익사의 냄새가 난다
파수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담이 생겼다
뒤를 볼 때마다 담장이 높아졌다
등에 담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담이 생기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돼
그리고 알게 되지,
담이 낯설지 않다는 것과 담은 그저 담일뿐이라는 걸
우리 담은 무시하고 병원에 가자
담장을 부수면 어떨까
너는 제안했지만 너를 끌어안을 때
나는 너의 담장을 바라봤다
우린 담장을 짊어진 채
서로 파수꾼이 되어야한다
처음에 너는 담장에 닿았지
나의 끝을 건드렸지
우리는 서로의 담장을 껴안는 물음의 형식
초과하는 감정을 더듬으며
무서운 질문이 되어간다
참 이상하지, 담장은 바깥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안을 향해 몰려드는 벽돌들
너는 가끔 창문 닫는 것을 잊어버리지
밖에서 안으로 손이 넘나들 때
나는 담장으로부터 한참이나 멀다
우리는 뒤집힌 장갑처럼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앞에 놓인 담장을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목이 담장을 지나갈 때까지
붉고 무거운 벽돌
하늘이 조각 케이크처럼 흘러내린다
받침이 없어 미래가 가라앉는다
타로카드를 한 장씩 뒤집으며 겨울이 온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주머니에서 털실이 한가득 쏟아진다
너덜해지는 것이 두려워 우리는 붉은 벽돌 한 장을 집는다
벽돌은 붉고 무겁고 깊다
우리는 미래를 동전처럼 뒤집으며 확륙이 반반인 죽음 위를 걸어간다
달콤하게 부드럽게 투명한 손들이 새떼처럼 드나들고
우리의 속살을 물어뜯고 날아간다
누가 먼저 빈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나
붉고 무거운 벽돌
모서리
밤마다 방에서 모서리가 자라났다 모서리를 먹으며 당신의 뒤통수는 불룩 튀어나왔다 나는 망치로 당신의 모서리를 두드렸다 집안에는 둥근 무기들이 늘어갔다
어디든 모서리는 많고 당신은 모서리를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당신의 모서리는 뾰족하고 접히는 성질이 있다 우리는 모서리를 기른다 직각으로 꺾이는 자세가 마음에 든다
당신은 텔레비전 속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을 본 적이 있다 바다에 박혀 있던 검은 섬은 침몰하기 직전의 배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선체의 모서리는 밝게 빛났다 푸른 불빛이 쏟아지는 방안이 문득 낯설다고 느끼는 순간 방이 조금씩 기울었다 의자의 나사가 헐거워질수록 한쪽 다리를 꼬고 앉는 자세가 늘어갔다
베개를 끌어안고 나는 기나긴 잠 속으로 들어간다 잠의 깊고, 부드러운 이빨에 물리면 돌아오는 길을 잃는다고 당신이 말했다 꿈속이다
배가 흔들리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람들이 뛰어다닌다 멀리 항구에서 고동 소리가 들려온다 등대의 불빛을 따라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사람들
형광등이 깜빡거린다 표류하던 폐선이 해안가로 밀려온 것처럼 방이 또 한 번 출렁거린다 나는 모서에서 눈을 뜬다
망치를 든 당신이 나를 두드렸다
김석영
1981년 서울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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