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2013년 제15회 수주문학상 수장작 - 서술의 방식 / 심강우

문근영 2018. 9. 11. 02:49

[제15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서술의 방식 / 심강우(본명 심수철)

 

 

개미를 낱말로 개미들을 문장으로 아무 데나

펼쳐진 개미집은 구멍 난 책으로 읽는다

여왕개미의 혼인비행은 표지를 장식한 제목이다

첫 문장의 고비를 넘기면 문장이 문장을 물고 나가는 법,

잉크병에서 듬뿍 찍어낸 낱말들이 길바닥도 모자라

나무와 새의 몸통까지 적어 나가는 왕성한 필력

아파트 화단이며 담장이며 경계 너머

창틀과 침실까지 서술하는 바람에

주제를 벗어났다는 비판에 시달린다

낱말을 쿡 찍는 지적보다 신발밑창 단위의 어절로

지워지는 현실, 그래도 마침표를 찍지 않는 건

분량 제한이 없어서일까

 

당신과의 만남을 제목으로

내 몸에서 빠져나간 문장을 생각한다

처음엔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역, 만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가지런히 써 내려갔었다 연애와 혼인엔 수식이 많았고

아이를 키울 땐 각주가 많았다 변명과 책임만으로

다 쓰지 못한 본문은 늘 빈약했지만 금박 장정,

베스트셀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구름은 그래서 과중하다 싶으면 비를 내리고

강과 바다는 뜨거운 태양과 거래를 했던 것이다

체중을 줄여 나갔던 것이다

 

오타로 찍혀 찾아온 공원 벤치

풀린 구두끈을 타고 구겨진 바짓단을,

그 위의 보푸라기까지 설명하려 드는

저 문장의 행갈이를 선뜻 털어버리지 못하는 건

적정한 매수(枚數)를 잊고 살아온 까닭이다

상투어를 버리고

군더더기를 버리고

아직 묶지 못한 나란 원고를 퇴고 중이기 때문이다

 

 

심사 : 천양희, 김명인

 

 

<당선자의 다른 시 2편>---------------------------

 

 

기울어진다는 것

 

 

지구가 23.5도 기울어져 자전하는 건 달 때문이야

햇빛이 골목을 찾기 좋게끔 수그린다는 것

조수 간만의 차로 조개 낙지가 개펄을 경작할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변화무쌍한 사계의 색깔이 당신과 나

빛바랜 마음을 때맞춰 갈아입힌다는 것

장대 끝을 쥔 달의 손, 은근한 악력 덕분이야

 

장대가 꺾이고 출렁, 달이 떨어져 나간다면

자전축이 바뀌고 지구의 혈압이 급상승할 거야

개펄은 마르고 열대와 혹한을 오가는 폭풍도 생기겠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찻집 같은 지대가 없다는 것

낮과 밤, 계절의 얼굴도 그게 그거여서 화가나 시인들은

자신의 얼굴을 이젤에 걸거나 원고지 칸에 가두고 말 거야

 

언젠가부터 당신은 달을 동경하고 또 달의 힘을 믿었던 거야

그윽한 시선으로 그들의 심중(心中)을 떠받치고 있었던 거지

당신은 태생적으로 삼엄한 직각의 자세가 불편한 사람

그들의 각도가 가파른 층계를 만들 때에도

당신은 웃음으로 각의 기울기를 유도하지, 그것은

허리를 굽혀 층계를 내려오거나

최소한 어깨를 낮춰 악수를 청할 때 생기는 자세

알면서도 썰물로 드러나는 속내를 들킬까, 주저하는 자세

 

그들이 당신의 인력(人力)에 서서히 끌리면서 일정한 궤도가 생겼어

23.5도 비스듬한 번지와 번지를 잇는 산책로가 생긴 거야

마음의 기슭에 찰랑찰랑 물결이 마르지 않고 미풍이 불어오는 것도

기울어진다는 것, 그들이 갓 볶은 커피 향을 맡으며 대화를 나눌 때

어느 시인은 비로소 아름다운 사계의 풍경을 원고지에 담기 시작해

펜을 든 시인이 찍는 잉크가 달의 몸에 고인 크레이터*라는

사실을 마침내 그들이 믿게 된 거야

 

*크레이터: 달은 지구로 오는 운석을 막아준다. 크레이터는 운석이 충돌하면서 생긴 깊은 웅덩이.

 

 

 

먼지의 계보

 

 

마루를 닦다 보면

먼지 아닌 것들이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문질러도 겉장이 읽히지 않는

나뭇결과 다른 형태소를 만날 때가 있다

곁방살이의 눈치처럼 찐득하게 붙어 있는,

한때는 일거수일투족 달콤한 풍미를 발하던 때깔이

거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지의 본산을 이루었다

먼지가 먼지를 불러 더 큰 먼지를 쌓는 건

생로병사의 이름으로 증빙된 가계의 내력에도

소상히 나와 있지만 제 얼굴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오늘도 분분한 의견과 고요한 탄식이 있다

 

길을 낸다는 이유만으로

앞의 것들을 모질게 닦은 적이 많다

지금 당신이 들여다보는 먼지를 뒤집어 쓴 것들

내가 아니면 모두 먼지가 되어야 하는 것들

먼지가 길을 증명해 보인다고 항변하는 것들

 

대개는 밖에서부터 시작되지만 더러 안에서부터

먼지가 되는 것들도 있다 먼지의 실록은

사계절 변천은 물론 꽃과 별, 마천루의 불야성도 먼지로 필사해

쌓아두는 습성이 있다 승자와 패자의 이름도 마찬가지,

실은 인간이야말로 먼지가 가장 선호하는 개체이다

생각하면 세탁소를 가진 종족은 인간뿐이다

걸레질도 때가 있고 순서가 있음을, 당신과 나는

기압과 기압 사이 혹독한 바람을 싫어하는

같은 항렬을 가지고 있다

 

지금 여기, 먼지로 해체되기 전의 큰 먼지덩이가

소복한 가루의 서사를 읽느라 골똘하다

 

 

 

 

<15회 수주문학상 심사평>

 

15회 수주문학상의 예심에서 추천된 수상후보작들 가운데 단연 돋보였던 것은서술의 방식」「기울어진다는 것」「먼지의 계보등을 응모한 심강우 씨의 시편들이었다. 이 응모자의 작품에서는 쉽게 해독되는 것 이상으로 진중한 심사를 가라앉히는 차분한 서정성이 돋보였다. 시인은 대상 속으로 스며들면서도 결코 함몰되지 않는 시선의 집중력을 유지한다. 진심을 온축시킨 이 응시에는 그리하여 고요한 활기가 느껴진다. 사변적인 주체조차 사물의 구체성과 어울리게 주제의 시선을 대상 깊숙이 끌어다놓는 수사적 재능은 오랜 시간 시를 갈무리해온 결과이리라. 말하자면 그것은 이전의 시 세계를 모질게 닦달해서 얻어낸 전취물이 아니라, 우리 시의 전통을 찬찬히 음미하면서 발전시킨 능력이라 믿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새로운 시의 미학을 향한 문제적 시선이 옅은 대신, 발화된 심상의 근거를 안고 가는 그 나름대로의 형상성이 살아있다. 그리하여 이 응모자의 시 세계는 이즈음 시들이 보여주는 장황하고 난삽한 중첩에서 비켜서게 되는 것이다. 아쉽다면 수사적 평명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저만의 개성을 뚜렷이 구사하는 구상력을 배가시키는 것이 형상성의 묘미를 살려내는 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선자(選者)들은 위의 응모자 외에도 쫄깃한 끼니, 만삭, 콩나물은 헤비메탈을 좋아하지 않는다외 등을 각각 제출한 응모자의 시편들도 개성적인 사유와 감각의 우수성 등으로 그 나름의 시 세계를 펼쳐보였다고 판단했다. 수상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격려의 몫에 들기에는 충분하였다. 민족시인 수주 변영로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이 상이 오래도록 눈부시게 문학사의 중심에서 타오르길 바란다.

 
 
                                                    심사위원 : 천양희 김명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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