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질마재문학상 수상자 대표시〉
몽해항로 1 (외 2편)
—樂工
장석주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 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가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젖을 먹고 악기의 목을 비틀 때
중국술은 빠르게 주는 대신에
밤의 邊境들은 부푸네.
시 1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이니
피와 살로 살고 남은 시간은 몸에 저축한다.
허나 몸은 사상누각砂上樓閣이니
그 집이 영원하다고 착각하지는 마라.
낙타를 만나거든 낙타가 되고
모래바람 이는 사막이 되라.
순례자를 만나거든 옛길이 되고
오래 된 성전聖殿이 되라.
비를 만나거든 피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천둥으로 울고 번개로 화답하라.
강을 만나거든 바람으로 건너고
산을 만나거든 묵은 소나무 곁 바위로 살라.
고아를 만나면 푼돈을 쥐어주지 말고
그의 작은 주먹이라도 되라.
거지를 만나면 불우를 연민하지 말고
그의 옷 솔기에 붙은 이라도 되라.
부처를 만나면 보리수가 되고
보리수 아래 푸른 그늘이 되어 누워라.
나한을 만나거든 나한이 되고
나한이 싫으면 주린 뱀이 되라.
개구리를 만나거든 뱀으로 살지 말고
차라리 개똥이 뒹구는 풀밭이 되라.
혹한이거든 얼음으로 꽁꽁 얼어 있다가
얼음이 풀리면 시냇물로 흘러라.
죽음을 만나거든 꽃으로 피어나지 말고
여문 씨앗으로 견뎌라.
그믐 눈썹
—K에게
해가 구르듯 지고 바람은 대숲 아래서 가벼이 목례를 하네요 고양이는 푸른 인광을 번뜩이며 하얗게 울고요 자꾸 울고요 숯이라도 내 마음 탄 자리를 검다 하지는 못하겠죠 물은 물속 일을 모르고 꿈은 제가 꿈인 줄도 모르죠 그러고 살았죠 단풍나무 뒤에 서 있는 당신 어깨 너머로 계절 몇 개가 떨어져요 당신 눈 위에 눈썹은 검고요 당신은 통영을 간다 하네요 발톱 가진 어둠 몇 마리가 칠통漆桶 속에서 울부짖죠 무슨 일인가요 당신 눈동자를 보던 내 동공은 녹아 눈물로 흐르고 당신에게 뻗던 내 팔은 풀밭에 떨어져 푸른 뱀이 되어 스으윽 가을 건너 봄의 관목 숲으로 사라져요 피비린내가 훅 하고 끼치는 걸 보니 벌써 그믐이 가까워지나 봐요 당신이 내게 기르라고 맡기고 내가 젖동냥해서 기른 그믐이죠 어서 오세요 그믐 눈썹으로 오세요 열두 마리 고양이는 하얗게 울고요 그믐에 그을리고 탄 제 마음 자리는 숯이랍니다
— 시집 『몽해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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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붉디붉은 호랑이』, 『절벽』 등과 산문집 『이 사람을 보라』, 『추억의 속도』, 『강철로 된 책들』, 『느림과 비움』, 『책은 밥이다』, 『새벽예찬』, 『만보객 책 속을 거닐다』, 『취서만필』, 『나는 문학이다』 등이 있다. 그동안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학교, 명지전문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국악방송에서 ‘장석주의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 등의 진행자로 활동했다. 현재 서울 서교동의 ‘서향재(西向齋)’와 경기도 안성의 ‘수졸재(守拙齋)’를 오가며 ‘실존형 글쓰기’ 작가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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