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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바마시대와 한국 ③『흰 지배자와 검은 노예들』 - 김종철

문근영 2018. 8. 23. 06:21

2.2. 흰 지배자와 검은 노예들


미지의 땅이었던 지금의 북아메리카에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다. 드넓은 토지에 유럽과 서인도제도를 잇는 교역의 축으로서 그곳은 매력이 넘치는 ‘신대륙’이었다. 그들은 지금의 수도인 워싱턴과 인접한 버지니아 지역에서 금을 찾거나 담배나 면화를 재배하면서 원주민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필그림들(Pilgrims), 청교도들(Puritans)


그런데 돈 벌기에 혈안이 된 그들과는 달리 종교적 목적으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영국의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매사추세츠 지역을 개발하면서 장차 미국을 지배할 종교적, 사상적 토대를 쌓아가고 있었다.


  물론 영국의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 해안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미 16세기 초부터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 해안에 도착해서 인디언 부족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1620년경에 플리머스(Plymouth)에 소위 필그림들(Pilgrims)이 도착해서 하나의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필그림 교도들은 청교도들과는 달리 소박한 신교도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개종시키기보다는 그러한 세상과 분리되어 그들만의 순수하고 단순한 삶을 살려는 자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은 1608년 에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도시가 너무 상업적으로 발달해서 타락해 있음을 보고 결국 1620년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최중·김봉중 함께 쓰고 수정 보완함, <한국인이면 꼭 짚어야 할 미국의 역사>[이하 <미국의 역사>], 1992년 3월, 조합공동체 소나무, 43쪽)


1620년 11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9주간 고난의 항해를 한 끝에 지금 미국 동해안의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 이 필그림들이 미국을 지배할 와스프의 선조였던 것이다. 1630년 3월에는 청교도 1천여 명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고, 그 이래 10년 동안 1만8천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새 예루살렘에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느님이 요구하는 지상 낙원을 위해서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선민의식과 타락한 세상을 개혁한다는 선교적인 사명의식은 앞으로 미국이 성장하면서 항상 미국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던 사상이며, 특히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들과 접촉할 때 이러한 사상은 크게 작용하였다. 먼저 그들이 북미 대륙에서 인디언들과 접촉하였을 때 청교도들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한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문명화시키는 책임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이러한 인디언 선교 희망이 인디언들의 독특한 생활환경과 사회여건으로 무산되자 이제는 무력으로 인디언들의 땅을 점령하였다. (위의 책, 48~49쪽)


바로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인디언’을 ‘흑인’이나 19세기 후반의 ‘조선인’으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가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순수한 선교 목적을 벗어나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앞장에 선 역사,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필그림들이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상륙한 1621년 초보다 16개월쯤 앞선 “1619년 8월 하순 어느 날, 적어도 세 명의 여자를 포함한 20명의 흑인을 실은 한 척의 범선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우연히 상륙했다. 체사피크만 근해로 들어온 사략선인 이 배의 출현은 우연적이어서 확실히 그 결과가 미친 오랜 영향만큼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새로운 한 인종이 제임스타운 발견 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개척지로 들어온 것이다. (벤자민 콸스 지음, 조성훈 이미숙 옮김, <미국 흑인사>, 2002년 12월, 백산서당, 39쪽)

  <* 1940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벤자민 콸스(Benjamin Quarles)가 쓴 <미국 흑인사>(The Negro in the Making of America)는 본격적인 미국 흑인사 연구서로서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터치스톤 북스(Touchstone Books)의 1996년판을 번역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이 분야의 개설서이다.>


‘계약제 하인’ 대신 흑인노예들


제임스타운에 부려진 흑인들은 노예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제 하인’이 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약제 하인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신대륙’에서 노동자로서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자유노동자의 임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들이 필연적으로 눈길을 돌린 쪽이 흑인 노예들이었다.


흑인노예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8세기 초부터 아랍인들과 무어족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하라사막을 통해 지중해 국가들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래 뒤에 노예무역을 본격화한 것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인들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나중에 그곳이 인도가 아님이 밝혀진 뒤 ‘서쪽에 있는 인도’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에 상륙한 이래 개척된 중남미 지역의 대농장들에 흑인 노예들을 ‘공급’했다.


  영국은 1663년에 찰스 2세가 왕실 모험단 회사(Royal Adventurers)에 특허장을 줌으로써 뒤늦게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참가하게 되었다. 17세기말 까지는 영국은 네덜란드와는 비교되지 않는 소규모의 노예무역을 하였으나 북미 대륙에서의 그들의 식민지 발달과 해상세력의 성장으로 18세기말 경에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노예무역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윽고 18세기 내내 영국은 적어도 6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역사>, 25~26쪽)


영국이 한 세기 동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한 흑인 노예가 ‘적어도 6백만 명’이었다니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선적’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리고 1865년 남북전쟁의 결과로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미국 땅으로 팔려갔을까?


지난 2006년 10월 17일 미국 인구는 3억을 넘어섰다. 2005년 통계를 보면 미국인 중 흑인의 비율이 11.9%였으므로, 3억 중 3천5백70만여 명이 흑인인 셈이다. 그런데 1663년부터 영국이 한 세기 가까이 팔아넘긴 노예 6백만여 명과 그 이후 미국으로 강제 이송된 흑인들이 정상적으로 결혼해서 자손을 늘려갔다면 3백년이 넘는 기간에 겨우 3천5백만 명을 넘겼을까? 흑인들이 백인에 비해 자식을 더 많이 낳는 추세를 감안하면 지금 미국의 흑인 인구는 1억을 넘었어야 정상이 아닐까? 우리는 여기서 엄청난 수의 흑인들이 비참한 노예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자유를 찾아 달아나다 백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 본토의 내전이나 해외에서 벌어진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 흑인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아프리카에서의 ‘노예사냥’ 참혹사


‘흰 지배자들’이 인신매매로 돈을 벌거나 농장이나 다른 사업장의 종신 노예노동자로 부리려고 아프리카에서 ‘사냥’해 오는 과정에서 흑인들이 당한 고통과 희생은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한 장으로 기록되는 것이었다. 그들 나름으로는 평화롭게, 풍족하지는 못하더라도 우애를 나누면서 살던 아프리카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기습해오는 백인들의 총칼과 그물 앞에서 속절없이 포로가 되어 가족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노예선에 실려야 했다.


  아프리카인들이 미국 대륙까지 팔려가는 과정은 참혹한 인간 역사의 드라마였다. 그들이 받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아프리카 노예 사냥꾼에 의해 붙들려서 멀고 먼 적도선을 따라 손목과 목을 쇠줄로 묶인 채 여러 사람의 무역꾼들의 손을 거쳐 황금 해안으로 불리는 서해안으로 끌려왔다. 어떨 때는 1,000 마일 이상을 쇠사슬에 묶여 맨발로 행군하여 끌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5명 중 2명꼴로 생명을 잃었다. 그들이 겪게 되는 육체적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며 어떤 자들 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역사>, 26쪽)


한 영국인 선장은 그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고 한다.

 

  흑인들은 그들이 모국을 떠나게 되자 질색을 하고 가끔 카누와 보트 그리고 배에서 뛰어내려 죽을 때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위의 책, 같은 쪽)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목숨이다. 그 누구도 까닭 없이 목숨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노예로 팔려가려고 배에 짐짝처럼 실린 사람들 중 다수가 죽음을 선택했다. 그들은 가족과 고향을 잃고 자유가 없는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로 갔던 것이다.


노예선에서 살아남아서 백인들에게 팔린 흑인들이 아메리카에서 겪은 고난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을 기록하려면 수십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여기서는 알렉스 헤일리(Alex Haley)라는 흑인 작가가 쓴 소설 <뿌리>의 주요한 대목들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쓴 알렉스 헤일리


1976년 미국에서 <뿌리: 미국가족의 대하소설>(Roots: The Saga of an American Family)이라는 책이 나오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 책을 쓴 헤일리는 1960년대 초반에 혁명적 흑인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암살당한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기록함으로써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있던 사람이다. 나는 1970년대 후반에 <뿌리>와 <말콤 엑스>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에 참여했으므로 헤일리와는 인연이 깊다 할 수 있어서, 그 책들을 번역하던 시기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21년 뉴욕주 이타카에서 태어난 헤일리는 테네시주의 헤닝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가족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농학 교수이던 그의 아버지 사이먼 헤일리는 17살에 앨콘 주립대를 자퇴한 알렉스를 군대로 보냈다. 그렇게 해안경비대에서 시작한 군대생활이 20년이 되었다. 따분한 해상생활에서 글쓰기에 몰두한 그는 38살에 제대한 뒤 갖은 곡절을 겪은 끝에 1960년에 흑인 이슬람 지도자 말콤 엑스 인터뷰를 월간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흑인운동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서 백인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말콤 엑스가 1963년 자서전 집필을 부탁하자 1년간 그를 인터뷰 하고 1년에 걸쳐 책을 썼다. 그 책은 곧 전 세계 8개 국어로 번역되어 6백만 부가 넘게 팔렸다. 헤일리의 친구이기도 했던 말콤 엑스는 자서전이 출판된 1965년 7월보다 6개월 전, 곧 원고가 출판사로 넘어가기 직전에 암살당했다.


그런 비극적 사건을 당하고서도 어쨌든 유명해진 헤일리는 어린 시절 테네시주에서 할머니한테 들은 노예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듬어 올라가서 조상들을 추적한 끝에 ‘토비 아저씨’라고 불렸다는 7대조가 1767년 아프리카의 감비아에서 백인들에게 납치당해 노예로 팔려온 킨타 쿤테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직접 그 나라를 찾아간다. 그가 머나먼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에서 혈육을 만나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뿌리를 찾은 기쁨에 몸을 떨던 장면을 번역하던 일이 지금도 또렷이 살아난다.


헤일리, 뿌리를 찾아 고난의 역사를 기록으로


헤일리는 <뿌리>를 완성하는 데 조사와 답사, 집필에 무려 10년을 바쳤다. 그는 노예선 로드 리고니어호에서 킨타 쿤테가 겪은 고통을 체험하려고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가는 화물선을 타보기도 하고, 열흘 동안 밤마다 속옷만 입은 채 어둡고 추운 배 밑창의 짐칸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가 이 책을 위해 여행한 거리는 50만 마일이 넘었고, 만난 사람은 수천 명이었다. 그는 ‘노예제도에 관한 기록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아 1977년에 퓰리처상을 받았다.


알렉스 헤일리는 남성에서 남성으로 킨타 쿤테의 뿌리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었다. 아들이 없는 어떤 할아버지는 딸을 통해 대를 이었고, 그것이 헤일리의 몸에 아프리카 혈통을 물려주었다.


<뿌리>에서 특히 인상깊은 부분이 생각난다. ‘흰 주인’은 ‘검은 노예’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성경책 앞머리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주님의 은총으로 오늘 튼튼한 노예가 태어났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나이다.” 그 갓난 노예는 기독교식으로 세례를 받고 백인 주인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헤일리라는 이름도 물론 그렇게 받았을 것이다.


1979년에 미국의 방송사인 ABC가 <뿌리: 그 다음 세대들>이라는 연속물로 킨타 쿤테 후손들의 삶을 그려 방영하자 그때까지 그 부문의 최고 시청률이 나왔다고 한다. 그 이후 이 책은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교재로 채택되었고 지금까지 37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뿌리>가 미국에 안긴 정치, 문화, 사회, 역사적인 충격은 우리나라에도 오랜 기간 전파되었다. 한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적었다.


  밤을 새워 <뿌리>를 끝까지 다 읽은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미국이란 나라가 어떻게 만들어진 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밀가루를 공짜로 나눠주던 그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나라 미국의 속내에서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약탈과 살인과 착취가 있다는 것을.

 (·····)

  <뿌리>를 다 읽은 그 다음날 아침 나는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을 모두 들고 앞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뜬구름 잡는 식의 글이 깨알처럼 박힌 원고지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원고지는 순식간에 까만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마치 우리 조상님 제사를 지낸 뒤 지방을 태우는 것처럼. (블로그 ‘이소리 시인의 글나라’에서)


<뿌리>와 <말콤 엑스>(자서전)에 관한 기록들을 뒤지다가 흥미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다. ‘종각 번역실’(1975년 3월,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기자들이 생계를 위해 종로 1가 종각 맞은편에 작은 사무실을 내고 번역 작업을 하던 곳)에서 한진출판사 주간 이문구(작고한 소설가) 선생의 부탁을 받고 그 책을 우리말로 옮겨 낸 것이 1977년께였는데 한참 뒤에 번역본이 또 나온 것이다. 안정효 선생이 2006년 2월에 출판사 ‘열린책들’을 통해 낸 책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번역계의 대가이자 뛰어난 소설가인 분이시니 32년 전에 우리가 서툰 솜씨로 옮긴 <뿌리>보다 뛰어날 것이다. 이보다 4년 전인 2002년 1월에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만화가 이두호 선생이 그림으로 <뿌리>를 출판했다. (도서출판 산하)


말콤 엑스 전기도 우리(김종철, 이종욱, 정연주)가 1978년 7월에 처음 번역본을 낸 지 15년만인 1993년 5월에 다시 나왔다. (심대환 옮김, 세기)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열망과 투쟁은 세월이 흘러도 시들지 않는 문학의 소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계속>

글쓴이 / 김종철
· 전 동아일보사 기자
·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2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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