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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바마시대와 한국 ② 『아메리카의 비극』 - 김종철

문근영 2018. 8. 21. 02:19

 

 

오바마시대와 한국

제2장 아메리카의 비극


 1. ‘아메리카 인도인’의 참상과 조작된 역사


미국(美國)은 ‘아름다운 나라’라는 뜻이다. ‘쌀의 나라’(米國)라고 쓰는 데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America Beautiful’을 고수하고 있다. 1986년에 대학생들이 서울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광주 학살의 원흉 미국은 물러가라”고 외치던 때 그들에 호응하던 젊은이들과 민주인사들이 ‘꼬리 나라’(尾國)라고 부른 적이 있기는 하다.

 

실제로 미국은 아름답고 큰 나라이다. 자연과 땅덩어리만을 보면 대미국(大 美國)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동북쪽의 메인주부터 동남쪽의 플로리다주까지, 서북쪽의 워싱턴주부터 서남쪽의 캘리포니아주까지, 그리고 러시아와 코를 맞댄 알래스카주와 남태평양의 ‘낙원’이라는 하와이주를 안고 있는 아름답고 큰 나라이다. 그뿐인가. 카리브해의 푸에르토 리코와 버진 아일랜드에서 시작해서 남태평양의 괌과 사이판까지 드넓은 영토를 거느린 세계 최강대국이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을 처음 여행하는 외국인들은 국토의 광대함과 자원의 풍성함에 압도당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땅과 자연이 본래는 지금 거기서 주인 노릇을 하는 와스프의 선조들 것이 아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메리카의 비극은 바로 이 잘못된 역사에서 비롯된다. 그것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아메리카 인디언’이다.

 

버락 오바마의 집권을 혁신적인 사건으로 보면서 그것이 한국에 미칠 영향과 한반도가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려는 이 글에서 이런 화두를 던지는 까닭은 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미국의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그릇된 교과서로 미국을 배우는 청소년들이 그렇다.

 

여러 역사가들이 확인했듯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1492년 10월 12일에, 지금 바하마제도라고 불리는 곳에 상륙했을 뿐이었다. 그는 1500년까지 세 차례나 카리브해로 항해했는데, 끝내 그 지역을 ‘인도’라고 믿고 죽었다.

 

콜럼버스의 본명은 크리스토토로 콜롬보로서, 이탈리아의 제노바 출생이다. 그는 1479년에 결혼한 뒤 수학자 P. 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해도 인도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1484년에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인도 탐험’을 제안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지금 스페인의 일부인 카스티아를 통치하던 여왕 이사벨라 1세의 후원을 우여곡절 끝에  얻어내어 대서양을 서쪽으로 건너갔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 여러 나라들은 콜럼버스를 죽음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발견한 ‘영웅’으로 추앙해왔다. 아직도 그런 나라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철저히 자기 이익을 위해 움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항해 결과 발견한 토지의 실질적 통치자로 임명되어 그 권리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이사벨라 여왕과 작성했다. 그는 1492년 8월 3일 출항하여 10월 12일, 현재 바하마제도의 와틀링섬으로 추정되는 곳에 상륙했다. 그와 선원들이 온갖 어려움과 위기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왕권의 새 영토 개발 전위대로 나선 ‘탐험가들’ 거의 모두가 부닥친 일과 다름없었다.

 

어쨌든 콜럼버스는 ‘인도’를 발견하고 지금 쿠바 땅 일부의 부왕(副王)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권력과 상당한 부를 누릴 수 있었으나 1504년 이사벨라가 죽은 뒤 부왕 세습권도 잃고 사람들의 관심도 별로 못 받은 채 세상을 떠났다.


원주민에겐 침략자이자 약탈자


콜럼버스는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이지만, 카리브해의 여러 섬 사람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침략자이자 약탈자였다. 그가 첫번째 항해 때 카리브해의 섬에 남긴 선원 40여명은 아메리카 식민 제1세대가 되었다. 그 이래 그 지역 섬들로 간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을 죽이고 땅과 물건을 빼앗기를 일삼았다.

 

콜럼버스가 상륙한 바하마제도나 쿠바는 미국의 동남쪽  끝에 있는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런데 왜 대다수 미국인들은 그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가? 미국은 콜럼버스가 바하마제도에 상륙한 날인 10월 12일에서 가장 가까운 월요일을 해마다 공휴일로 정하고 거창한 행사들을 벌인다. 우스꽝스럽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희극 아닌가? 

 

그 역사적 경위는 다음과 같다. 1497년부터 1503년까지 콜럼버스 선단을 따라 카리브해 지역과 지금의 파나마 부근으로 여러 번 항해를 한 이탈리아인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 1454~1512)였다. 그는 1503년에 알베리쿠스 베스푸시우스(베스푸치의 라틴식 이름)라는 필명으로 <신세계>라는 작은 책자를 냈고, 1505년께에는 <4회의 항해에서 새로 발견된 육지에 관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서한>을 발간했다. 이것들을 ‘근거’로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 M. 발트제뮐러가 <세계지(世界誌)입문>이라는 저서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아메리고의 이름을 따서 ‘신대륙’을 아메리카라고 부르자고 제창했고, 유럽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사상가이자 문필가인 랠프 에머슨은 “세비야의 피클 장사로 갑판장의 심부름이나 하던 베스푸치가 콜럼버스를 밀어내고 신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고 비난했다. 얼핏 옳은 주장처럼 들리지만 에머슨의 말 역시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첫째, 지금의 미국 땅은 신대륙이 아니라 이미 3만여년 동안 원주민들이 살아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콜럼버스가 상륙한 곳도 거기가 아니었는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땅을 ‘콜럼버스 콘티넨트(Continent, 대륙) 식으로 명명해봤자, 또 하나의 진실 왜곡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99년 4월에 <뉴욕 타임스>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딴 ‘아메리카’를 ‘1천년 간의 최대 실수’라고 지적했다. 이 역시 에머슨의 주장처럼 명백한 잘못이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졸지에 ‘아메리카’가 태어났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인디언’(Indian, 인도인)이라고 명명한 그 대륙의 원주민들은 누구였을까?


  지금은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인디언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으며 최초의 아시아계 이민자이기도 했다.

  이 최초의 아시아인은 기원전 30,000년 경부터 이미 이 대륙에 정착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고고학적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윤상환, <아메리카 인디언 투쟁사>, 2003년 10월, 메드라인 발행, 26쪽)


여기서 버락 오바마를 생각해보자. 그는 대통령 선거 ‘승리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와 노인, 부자와 빈자,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흑인과 백인, 히스패닉   계, 아시아인, 아메리카 원주민, 동성애인,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 모든) 아메리카 사람들이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도 아니고, 붉은 주(공화당을 지지하는 지역들-저자)와 파란 주(민주당 지지 지역)의 집합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 오바마가 연설에서 열거한 그 많은 미국 시민들 중 (흑인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이 그 나라의 당당한 일원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말인가? 내가 생각하는 답은 ‘아니다’이다. 그것은 오바마의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뛰어난 지성과 판단력, 그리고 통찰력을 갖추었다는 평을 듣는 오바마가 ‘아메리카 인도인’이 겪은 비참한 일들과 현재의 소외와 박탈감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신대륙 발견’이라는 미국의 전통적 가치관, 그리고 그 발견 이후의 기독교 중심 미국 역사를 그 스스로 부정하면 대통령으로는커녕 변호사로서도 주류사회에 하루도 머물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절찬상영 서부영화, 과장이거나 조작


내 또래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 미국의 ‘서부영화’를 많이 보았다. 6·25 전쟁이 터진 이듬해에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에 들어간 우리는 지금처럼 버젓한 영화관이 아니라 학교 건물 벽에 흰 천을 펼쳐 걸고 고물 영사기로 화면을 쏘던 ‘노천극장’의  관객들이었다. 서너 달에 한번쯤 “오늘 저녁에 서부영화 상영이 있겠사오니 면민 여러분의 많은 관람을 바라겠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울리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가슴을 설레면서 기다렸다. 수업을 마치고 십리, 이십리 길을 달려 집으로 간 아이들은 부모형제의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학수고대하던 영화는 나쁜 전기사정 때문에 밤 10시가 넘어서야 시작될 때도 있었다. 그것도 음향장치가 나빠서 ‘변사’의 1인 10역, 20역으로 말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미국에서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원본을 보통 화면에 쏘다 보니 ‘인디안’의 머리에 꽂힌 깃털이 스크린을 건 교실 벽 위로 치솟던 일이었다. 

 

우리가 서부영화를 그렇게도 좋아한 것은 ‘정의의 사도’인 서부 사나이들과 보안관들이 악하고 무지막지한 ‘인디언들’을 통쾌하게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말꽁무니에 밧줄로 매달고 질질 끌고 가면서 언제나 승리하기 때문이었다. 인디언들은 늘 산등성이 아니면 골짜기에 음흉하고 사나운 얼굴로 나타나서 창이나 칼을 휘두르면서 기성을 질렀다. 기병대나 서부 사나이들은 그들보다 수가 훨씬 적은데도 ‘용감하게’ 말을 몰고 돌진해서 결국은 인디언들을 무찔렀다.

 

그런 영화들이 순전한 거짓 아니면 과장이거나 조작이었음을 내가 깨달은  것은 1970년대 초였다. 1970년에 디 브라운(Dee Brown)이라는 작가가 낸 <운디드 니에 내 심장을 묻어주오>(Bury My Heart at Wounded Knee)가 미국에서 큰 반응을 얻자 한국에서도 번역판이 선을 보였다. 운디드 니는 북서부의 사우스다코타주에 있는 지역 이름인데 미처 책을 읽지 못한 우리나라 기자들이 ‘다친 무릎에 내 마음을 묻어 주오’라고 기사에 소개한 웃지 못할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두툼한 그 책은 ‘정의의 사도’로 불려온 서부 사나이들과 미합중국 군대가 얼마나 잔혹하고 비열한 살인자들이었는지를 역사적 사실들을 근거로 보여주면서 원주민 부족들의 비참하고 슬픈 역사를 생생하게 전했다.

 

이 책의 절정은 ‘운디드 니의 학살’이다. 1890년 12월 29일, 미합중국 제7기병대가 라코타라고 불리는 미니콘주 수족과 훙크파파 수족을 거주지에서 ‘보호구역’(reservations, 지정거주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검은 코요테’라는 귀먼 원주민이 무기를 버리라는 명령을 못 알아듣고 거부한 것이 발단이 되어 군인들과 원주민들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50여명의 원주민이 죽음을 당하고, 미합중국군 25명이 사망했는데 군인들은 지형의 특성을 모르고 아군이 쏜 총탄에 맞아 희생당했다는 설도 있다. 원주민 대부분은 비무장이었으므로 군대의 학살이 얼마나 잔혹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운디드 니 학살’은 ‘인디언 전쟁’이라는 것의 마지막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디 브라운은 이 책에서 서부영화나 미국 통속소설들이 영웅으로 즐겨 묘사해온 커스터(George Armstrong Custer)장군이 중령 때인 1874년, 현재 사우스다코타주의 비스마크로 원정을 나갔다가 원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지역에서 금을 발견하고는 대대적인 ‘골드 러시’를 일으켜 분노한 원주민들과 싸움에 휘말려 아주 비굴하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내 기억으로 그는 커크 더글러스가 그 역을 맡은 영화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는 것으로 그려졌다.

 

디 브라운은 용감한 전설적 보안관인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도 실제로는 ‘겁쟁이’였다고 썼다. 지금 예순이 넘은 이들이라면 1960년대에 <오케이 목장의 결투>라는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클라이맥스에서 버트 랭카스터(와이어트 어프 역)가 악당들을 제압하는 총격전 장면은 그야말로 서부영화의 백미였는데, 브라운의 책을 읽고는 그것이 심한 과장임을 알 수 있었다. (사족 같은 이야기인데, 나는 1996엔가 미국 애리조나주에 간 길에 툼스톤이라는 소도시에 있는 오케이 목장을 찾아가 보았다. 어릴 적에 본 영화의 목장이 기억이 잘 나지 않은 탓인지, ‘널찍한 땅’이리라고 생각했는데 마굿간 몇 개에 마당이 딸린 좁은 곳이었다. 그래도 영웅 와이어트 어프의 결투 현장을 몸소 보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석탄처럼 새까만’ 아버지와 ‘눈처럼 새하얀’ 어머니


버락 오바마가 디 브라운의 책을 읽었는지, <오케이 목장의 결투>를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바마가 이렇게 조작된 역사로 얼룩진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피부색이 검어서 흑인으로 ‘분류’되어 살아온 오바마, 그러나 조상이 노예가 아니라서 아프리카 케냐에서 자유인으로 살다가 하와이로 유학을 온 뒤 결국은 하버드대학까지 다닌 그의 아버지, 오바마의 표현대로 ‘석탄처럼 새까만’ 아버지와 결혼한 ‘눈처럼 새하얀’ 어머니, 그 아버지와 헤어지고는 인도네시아 남자와 재혼한 자유분방한 여성-이런 가족사를 가진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  ‘아메리카 인도인들’, 그리고 노예의 후예들인 흑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할까? 그는 ‘통합된 미국 50개 주’(United States)의 최고 지도자로서 232년 동안의 ‘위장된 통합’을 부분적으로나마 실질적 통합으로 바꿀 수 있을까?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에 상륙한 곳이 당연히 인도인 줄 알고 원주민을 스페인어로 로스 인디오(Los Indio)라고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가상의 게임(simulation game)을 한번 해보자. 콜럼버스가 상륙한 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진짜 인도로 가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카리브해를 계속 항해했다면 지금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 이르거나, 과테말라, 온두라스 또는 니카라과 동해안에 상륙했을 것이다. 실제로 콜럼버스는 마지막인 네번째 항해(1502~1504) 때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을 ‘발견’했다. 지금처럼 파나마운하가 뚫려 있었다면 그는 태평양으로 빠져나가서 첫번째 항해보다 몇 배나 어려운 고비를 넘긴 끝에 잘해봤자 지금의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을는지 모른다. 그랬다면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이족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검은 원주민들이 ‘로스 인디오’가 되었을 것이다.


학살과 약탈, 그리고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


콜럼버스가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카리브해 섬들에 상륙한 사실은 지금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는 대륙이 피로 물들게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이 순진한 종족들을 얕잡아보고 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고역을 시키면서 그들의 복종을 강요했다. 황금만 가지면 천당에 가는 영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콜럼버스는 황금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라와크족의 광부들을 강제로 모집하여 금광의 광부로 일을 하게 했고, 책임량을 캐내지 못하면 손을 자르거나 발을 잘랐다. 콜럼버스는 일을 할 수 있는 14세 이상 남자들을 모집했다. 그것은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스페인 본국의 노예시장에 끌고 가 팔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반항하던 인디언들은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리고 촌락을 불태우고 약탈은 그칠 날이 없었다. 1492년 산 살바도르에 (그가) 발을 들여놓은 후 10년간 수십만의 사람이 죽었다. (윤상환, <아메리카 인디언 투쟁사>, 75쪽)


그뿐 아니라 백인들이 가져온 홍역, 천연두, 폐결핵 등 갖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하루에도 수백 명씩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지금의  중앙아메리카, 곧 멕시코부터 파나마까지, 그리고 남아메리카 거의 전부(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은 브라질을 제외하고)를 스페인 침략자들이 살육과 약탈의 무대로 만든 서막이었다. 그들은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을 멸망시켰고, 수천만 아니면 1억이 넘을 수도 있는 ‘로스 인디오’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받들고 간 십자가는 인디오들을 ‘하느님의 품 안으로’ 이끈다는 구실로 정복자의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상영된 <미션>이라는 영화의 결말은 ‘기독교적으로는’ 감동적이지만, 오랜 문화와 종교를 박탈당해가는 원주민들의 실상을 그린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원주민들이 백인들의 비인간적 침탈과 지배를 당하면서 싸우고 패배하고, 때로는 적은 승리를 거두다가, 결국은 가난과 소외에 시달리는 피지배자로 전락해간 역사는 윤상환씨의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계속>


글쓴이 / 김종철

· 전 동아일보사 기자
· 전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편집부국장
· 전 연합뉴스 대표이사 사장
· 현 재능대학교 초빙교수
· 평론으로 <상업주의소설론> 등, 저서로 <저 가면 속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을까>(1922)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1995), 역서로 <말콤 엑스>(공역,1978) <산업혁명사><프랑스혁명사>(1982) <인도의 발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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