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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학을 실천한 최고 관료학자, 김육(金堉) / 신병주

문근영 2018. 5. 15. 00:55

제105호 (2008.8.27)


실학을 실천한 최고 관료학자, 김육(金堉)


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최고의 관료학자하면 누구를 손꼽을 수 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김육(金堉:1580~1658)이 첫째나 둘째손가락에 꼽힐 것으로 확신한다. 당시 사회에서는 혁신적인 조세법인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였고, 화폐의 유통과 같은 실물경제 감각을 지니고 실천한 빼어난 관료였다. 시헌력이나 수차(水車)의 보급도 김육의 경제적 공헌을 언급하는데 빠지지 않는 것들이다.


조세제도의 공평과 효율을 위한 대동법 등 많은 민생책을


1658년 9월 김육이 사망한 날짜에 기록된 졸기(卒記)는 김육의 삶의 행적을 압축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김육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대사성 김식(金湜)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효행이 독실하였고 장성하자 문학에 해박하여 사류들에게 존중받았다. 광해조 때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산 속에 묻혀 살면서 몸소 농사짓고 글을 읽으면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인조반정에 이르러 제일 먼저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특별히 현감에 제수되고 이어서 갑과에 뽑혔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이는 79세였다. 그의 차자 김우명이 세자의 국구(國舅)로서 청풍부원군에 봉해졌다.”


위에서 보듯 김육은 조선시대, 아니 한국 전근대에서 조세제도의 공평화와 효율화를 가져온 대표적인 세법인 대동법의 입안자이자 실천가였으며, 시장의 발달과 경제의 효율화에 기여한 동전 통용책을 추진한 학자관료였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효종이 그가 죽자 탄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한 부분이다. 그만큼 김육은 왕의 신임을 굳건히 받고 자신의 의지를 실천한 탁월한 관료였다.


 학자관료로서, 당색은 약하고 실물경제에 강하다


김육은 관료로서 국정을 이끌어가고 주요 현안들을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학자적 자질도 겸비하였다. 조선중기까지의 인물열전이라 할 수 있는 『해동명신록 海東名臣錄』의 편찬을 비롯하여, 청나라 기행문인 『조천일기 朝天日記』,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는 사항에 관한 저술인  『구황촬요』, 『벽온방』 등 김육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저술도 다양하다.


당대까지의 인물 평가에 해당하는 『해동명신록』이나 중국의 백과사전인 『사문류취』를 참조하여 만든 백과사전인 『유원총보』는 김육 사상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는 문헌이다. 『기묘제현전』에는 김육의 선조가 기묘명현(己卯名賢)에 포함되는 김식이었던 만큼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피화인에 대한 김육의 존숭이 잘 드러난다. 이것은 김육이 실용을 중시하는 경제가이면서도 사림파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한 인물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김육의 다양한 저술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분석과 이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의 김육 연구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학자로서 관료로서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육에 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는 별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학파나 당파 중심의 조선중, 후기 인물 연구사의 경향은 정통 관료학자로서 크게 활약을 하면서 당색의 색채가 약했던 김육과 같은 인물 연구를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김육과 같은 관료학자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김육과 같은 인물을 통하여 조선시대 학자들이 성리학이나 철학 논쟁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물 경제에 주력한 측면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 민생을 실천한 관료에 주목


사실 이제까지 실학에 대한 연구도 주로 정치권에서 한발 물러난 재야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7세기 김육을 비롯하여 김신국, 남이공, 조익, 김세렴 등 정치에 참여하면서 사회경제적 업적을 이룬 인물이 많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김신국이나 남이공 같은 관료는 북인으로서 광해군대 정국에 참여했지만 그 재국(才局)을 인정받아 인조반정 이후에도 여전히 조정의 핵심관료로 활약하였다. 그만큼 실무 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이들 인물에 대한 재조명은 조선후기 실학의 범주를 넓힐 것으로 기대된다.


‘백성의 현실적 삶’을 실(實)로 보아 정치의 중심 화두에 둔 김육의 사상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보편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생애에 걸쳐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학자는 흔치 않았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기존의 조선 중, 후기 사상사 연구가 당파적, 학파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측면이 컸다면, 앞으로는 당파나 학파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과 안민, 부국(富國)의 입장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실천한 관료학자에 대한 연구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현실적 여건과도 긴밀히 연결되고 있다. 한 동안 우리 현대사에서 주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던 사상이나 이념 논쟁의 분위기가 퇴조하고, 현실적인 삶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입장이 우세해지고 있다.


민생과 부국을 일생의 신념으로 삼고 이를 실천한 관료학자, 또는 ‘재조(在朝) 실학자’ 김육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를 통하여, 이념과 실용의 노선이 충돌하고 있는 우리의 시대에 새로운 반성과 전망을 이끌어낼 수는 있지 않을까.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저서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함께, 2007

          『제왕의 리더십』, 휴머니스트, 2007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중앙M&B, 2003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등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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