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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형권 시집 『전당포는 항구다』- 육점 여사의 고기천국 외 2편

문근영 2018. 3. 17. 10:14

육점 여사의 고기천국 (외 2편)

 

          박형권

 

 

골목 안 사거리에 천국이 있다

살점 한 덩이에서 '정태춘'이 흐르고

육점 여사의 육절기는 윙 윙 윙 빈 CD처럼 돈다

두어근 늦여름을 끊어가려고 고기천국으로 들어서서 

골목 사람들의 허기를 경청하는데

한 사람 들어와

누군가의 이름을 아름다이 부른다

누구나 혀와 어금니로 기억하는 이름, 돼지 삼겹살 씨를

진땀이 칼을 베고 지나가는 고기천국에서 천국에 닿지 않은 살점은 없다

고기를 내놓지 않고서 천국에 이르는 것은 욕심

누군가를 먹이기 위하여 생을 살찌운 이름들이

고깃덩이만으로 천국을 증명한다

뽈살 군, 꽃등심 양, 갈매기살 씨, 치마살 여사

이미 칼을 몇 차례 받으신 거룩한 이름들이

철벅! 도마 위에 올려지고

저미고 저며도 한번 불린 이름은 지워지지 않는다

능소화 흐드러진 지금은 꽃등심의 계절이지만

형편 맞추어 삼겹살을 산다

제 살을 저미듯 육점 여사는 한점이라도 저울 눈금에 맞추려고

떼어내고 떼어내고 또 떼어낸다

시장기로 가득한 내 양지머리가 그때쯤 깨닫는다

그 살점에 대한 예의를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장마전선이 물폭탄을 쏟아부은 동네의

자작한 하수도를 따라

늘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우리들의 정오를 지나서

나팔꽃 아래 듬성듬성 파인

골목으로 들어선다

비가 새지 않으면 방이 아니라고 믿는

공인중개사의 늙수그레한 자전거가 앞장을 서고

딸 자전거를 타고 나온 비옷 같은 아내가 그 뒤를 따르고

나는 아내의 젖은 꼬리를 물고

아직은 종아리가 단단한 페달을 밟는다

이 서울의 지표면에는

창틀이 마당과 맞물린 우리들의 꿈을 품어주려고

축축하게 젖어서 기다려주는

반지하 단칸방이 있어

우리들의 미래는 송이버섯처럼 번창하리

보증금 삼천오백만원은 우리 생명보다 소중하여

왼쪽 가슴에 단단히 찔러넣고 두근두근 돈이 심장 소리를 들을 때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대체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기에 그렇게 끈질기게 살아남는지

참새들이 골목에 나와 고단한 날개를 말린다

언젠간 바퀴를 크게 저을 수 있지만 오늘은 기어를 저속에 놓고

우린

자전거 타고 방 보러 간다

우리 네 식구가 냄새를 풍기며 구더기처럼 꼬물거릴

그 기도(祈禱)를 찾아서

 

 

 

 

 

콩나물국 먹는 날

 

 

 

오늘은 주인집 할머니가 우리 사는 지하방으로

자네 있는가, 새삼 다감하게 물어오는 날

기르는 콩나물 한 바구니 들고 오는 날

고맙게 받아서 국 끓이고 무쳐 먹지만

가끔은 콩나물이 싫다네

콩나물로 비유하면 지하방은 뿌리에 속해

집이 우리를 넉넉히 빨아먹어야 아지랑이 속에서

집은 바로 설 수 있다네

우리 식구 좋아하는 족발보쌈보다

딸아이의 보충수업비보다

유일하게 넣은 의료보험보다 조금은 더 비싼 방세를 올려주면

주인집 할머니 팬더곰처럼

속이 안 보이는 콩나물 한 바구니 들고 오신다네

일하면 먹고 아니면 굶으며 결국 지하방에 도착하였지만

사실 우리는 집을 먹이는 뿌리혹박테리아

우리가 있어서 집의 부름켜에 따뜻한 피가 돈다네

애면글면 키워놨더니 미국 이민 가버려

숟가락이나 뜨고 사는지 들어갈 구멍이나 있는지

딸 아들 생각하며

주인집 할머니는 오늘도 콩나물을 기르고,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가 살지

가지도 살지 잎도 살지

그리하여 잎 끝으로 찾아오는

이른 봄도 살지 하며

김치도 내려주고 고구마도 내려주고 경칩이 지난 개구리도 내려주지만

생때같은 방세 삼십오만원, 시원히 풀라고

콩나물 한 바구니 들고 내려와 슬그머니 쓰린 속에 밀어넣고 간다네

지표면에 콩밭 한평 가꾸고 싶어지는

오늘은 콩나물국 먹는 날

 

 

 

               시집  『전당포는 항구다』(창비, 2013)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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