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피
이화은
얕은 개울에서 놀다 온 날은
영락없이 발가락에서 피가 흘렀다
발가락 사이에
내 살처럼 엎드려 있던 거머리
통증 없이 흐르는 피는
암살자의 옆얼굴처럼 싸늘하고 담담했다
피가 새는 몸을 여자라 했다
달마다 피를 쏟아도 죽지 않는 몸
몸속에서 콘돔이 새고
달이 덜 찬 아이가 새어나갔다
어머니의 입에서 불쑥불쑥
독한년이란 말이 새어나왔다
독이 없는 그 말은 차라리 싱거웠다 맹탕이었다
우리 가계의 핏줄에서 피가 새고 있다고
등을 돌린 형제들이 가훈처럼 중얼거렸다
발등을 간지르는 개울의 기억 속에는
늘 핏물이 배어있다
피는 물보다 차가웠다
—《문학. 선》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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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경북 진량 출생. 1991년《월간문학》신인상 등단. 시집『이 시대의 이별법』『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절정을 복사하다』『미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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