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당선작 ‘밑줄 사용처’
한 자락 달빛 당겨 머리맡에 걸어 두고
읽던 책 펼쳐서 떠듬떠듬 길을 가다
내 삶의 빈 행간 채울 밑줄을 긋는다
한눈팔다 깨진 무릎 상처가 저문 저녁
난독의 삶 어디쯤에 밑줄을 그었던가
헛꽃만 피었다 스러진 내 사유의 빈 집
기울은 어깨 위에 허기 한 채 얹고서
다 닳은 더듬이로 하나씩 되짚어가며
접어둔 밑줄을 꺼내 내 미망을 꿰맨다
당선소감…김제숙
"당선 결실 가슴에 품고 시조처럼 살겠다"
시간은 빠르게 우리를 스쳐갑니다. 이 물리적인 법칙에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는 모두 다 다를 것입니다.
저도 어느덧 한 갑자(甲子)의 시간을 돌아 이제 처음 출발했던 자리에 다시 섭니다. 그동안의 삶을 하나의 매듭으로 여며 두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신이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듯합니다.
언제부턴가, 아마 저의 생이 반환점을 돌았다고 느꼈을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말을 하는 것보다 말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말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한 기운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결실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문학이라는 나무에 달아둡니다. 살아가면서 삶이 메마르고 곤고할 때면 한 번씩 바라보면서 다시 옷깃을 매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조는 참으로 매력적인 분야입니다. 무한정 늘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우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문학의 한 갈래입니다. 정해진 율격으로 정해진 그릇 안에 오롯이 담아내야 합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지극히 개별적인 작업이지만 보편성을 안고 있어야 합니다. 시조가 갖고 있는 이런 형식미가 남은 저의 삶의 지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내게 머물고 있는 말들을 보듬으며, 여전히 오고 있을 말들을 조용히 기다려야겠습니다. 말은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람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아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마지막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우선 자리를 마련해주신 매일신문과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더딘 걸음을 믿고 기다려주신 서숙희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함께 길을 가고 있는 포항시조사랑회 ‘더율’ 문우님들도 고맙습니다. 혼자였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언제나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결 같이 저를 지켜보고 계실 저 위에 계신 분께 경배를 드립니다.
※약력
1958년 부산 출생
계명대 여성학대학원 졸업
2012년 <신라문학대상> 수필대상, 등단
2016년 대구시조 전국공모전 차하 수상
2014년 수필집 『여기까지』 출간
포항시조사랑회 <더율> 회원
◆심사평
성찰하는 사유의 깊이가 감각적 언어와 조화
정병욱의 ‘시조문학사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시조의 역사는 천년이 넘는다. 오랜 기간 민족의 독자적인 문학양식으로 갈물어온 탓에 자칫 식상해보이고 자극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오랜 기간 검정된 민족정신의 가치질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시조장르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면 민족문학사의 이 도도한 흐름 안에서의 창조적 계승을 목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예년에 비해 응모 편수가 늘어나고 연령도 초등학생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기대를 부풀게 했으나 참신하고 개성적인 작품보다 불필요한 행갈이나 시류에 편승한다거나 감각적 언어유희의 작품이 여전하다는 점은 아쉬움이었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관심을 끈 작품은 권선애의 ‘기와 꽃’, 정경화의 ‘간 고등어’, 윤애라의 ‘삼애원 편지’, 김제숙의 ‘밑줄 사용처’ 등 네 편이었다. 그 가운데 ‘기와 꽃’과 ‘간 고등어’는 관찰력의 깊이나 언어의 감각적 조탁능력이 돋보였으나 메시지의 모호성과 종장처리의 미숙 등으로 후순위로 밀려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삼애원 편지’와 ‘밑줄 사용처’를 두고서는 서로의 장단점 때문에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애원 편지’는 어느 한센마을의 고발성 짙은 현장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나 ‘편지’라는 제목과의 서술적 불일치로 밀려나고 ‘밑줄 사용처’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작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하고 시적 은유의 폭과 깊이가 적절한 긴장미를 잘 살려 낸 가작이다. 제목부터 주목을 이끌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사유의 깊이가 감각적 언어와 조화를 이루었다. 아무쪼록 이번 당선을 계기로 시조단의 참신한 바람을 일으켜 주기를 기대한다. 민병도(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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