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을 읽다
김수우
구름이던 큰 나무에 구름이던 작은 새들이 앉아 있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인다 아무 할 일이 없다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하느님
담벼락에 걸터앉은 젊은 햇빛이 말을 건다
난 여섯 살 소꿉동무였어 얼굴 잊은, 탱자 울타리에서 불러대던 옥희라는 이름이 간질간질 돋아난다
나무는 무수한 몰락으로 자란다 고대 신화가 몰락의 힘으로 살아가듯
풀꽃과 어깨동무하고 한참 절룩이는데 뒤통수 닮은 진실들이 옆에서 걷고 있다
뚜벅뚜벅 걸어온 나무그늘이 어깨를 겯는다
어깨에 작은 새들이 논다 나도 어깨가 있음을 비로소 안다
몇 번 몰락에 발가벗은 것들은 기원(起源)을 향해 자란다
큰 나무는 자라서 작은 나무가 되고 작은 나무는 자라서 구름이 되고 구름은 자라서 새가 되는 마을
질긴 하느님, 씹었다가 뱉고 뱉었다 씹는 페이지, 유리창이 맑다
한참 가난해지고 나서야, 맑은 옥희 까르륵 웃고 있다
—시집『몰락경전』(2016)에서
-------------
김수우 / 1959년 부산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5년 《시와 시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길의 길』『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붉은 사하라』『젯밥과 화분』『몰락경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오르골 / 이미산 (0) | 2018.01.02 |
---|---|
[스크랩] 야생 / 김기택 (0) | 2018.01.02 |
[스크랩] 튜닝 / 최문자 (0) | 2018.01.02 |
[스크랩] 나무 심는 사람 / 금은돌 (0) | 2018.01.02 |
[스크랩] 자줏빛 연못 / 김선향 (0) | 2018.0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