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밑의 서재
문혜진
그해 여름,
산토리니 섬에 갔다
이아 마을 골목 끝
부르튼 발로 들어선
석양의 하얀 테라스
지중해 태양에 그슬린 얼굴을 감싸고
파란 나무의자와 낡은 타자기를 지나
하얀 계단을
내려가고
내려가면
젊은이들의 아지트
아틀란티스 서점이 있지
서점 구석
침낭을 베고 끌어안은
젊은 연인의 단잠 아래로
아무도 닿지 못한
사라진 대륙
청춘의 해골들이 못다 읽은
해저의 서재가 펼쳐지지
하얀 계단을
내려가고
내려가면
바닥 없이
가라앉는
바다 밑의 서재
그 어딘가
엎드린 넙치의 책과
무한히 뻗어가는
나선형 앵무조개의 페이지
한 가닥 붉게 튀어나온 사슴뿔 산호의
뿔과 뿔 사이
아직 쓰지 못한
내 수치의 묘와
비참의 관
해초의 푸른 머리칼 속에서 흐느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흰수염고래 울음소리
관조개 웅장한 파이프오르간 소리
뜨겁게 수장된
청춘의 해골 연인
사라진 아틀란티스 대륙의 언어로 속삭이던
사랑 노래가
파도에 밀려와
내 귓가에서 하얗게 부서지던
푸른 산토리니의 저녁
—《시산맥》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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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진 / 1976년 경북 김천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와 한양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졸업.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질 나쁜 연애』『검은 표범 여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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