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엔 복사물
서효인
허벅지에 힘을 주는 것은
다리가 벌어지길 막기 위함이다
다리를 벌리지 않는 것은
위대한 현대인이기 때문이다 옆 사람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현대는 옆을
돌아봐야 하는 세계이고 옆에는
얼굴이 있다 아는 얼굴인 것 같은데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이어폰에 받아두고
허벅지에 힘을 준다 다리를 꼬고 싶지만
참아 본다 다리를 꼬지 않는 것은
허리가 틀어지길 막기 위함이다
허리를 보호하는 것은 지속되는
섹스와 노동을 위해서이고 애석하게도
현대인은 둘 다 잘 못하고 화를 내고
화를 내지 않기 위해 허벅지에
힘을 준다 허벅지 위에는
복사된 쪽지가 놓여 있다
다리를 저는 남자가 옆에서부터
흐물거리는 종이를 회수하며 천천히
다가온다 허벅지에 힘을 준다
쪽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그러나 나는 현대인,
쪽지가 떨어진다 허리를
숙이는 그의 표정을 박아둔
종이가 무한히
복사되고 복사된다
—《현대시학》2016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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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인 / 1981년 목포 출생. 전남대 국문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명지대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재학.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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