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간단합니다 / 임지은

문근영 2017. 10. 31. 12:35

간단합니다

 

        임지은

 

 

 

    지금이 몇 시인지 알고 싶다면 시계를 보면 됩니다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있고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도 있고 
    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함부로, 쉽게, 간단하게 
    지워 버려도 의미가 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사를 사랑합니다

    한없이 가벼운 자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의지를 신뢰합니다

설탕을 빼 버리면 이 세계의 복숭아는 모두 상해버리고
통조림 안의 복숭아는 안전합니다 

간단합니다 
나는 얼마간 부사가 되어 있겠습니다 

그건 검은 해변에 운동화를 놓고 오는 일

잘 닦인 유리창에 지문을 남기는 일

줄넘기 없이 수요일을 뛰어넘는 일

 

아프리카로는 갈 수 없지만

내일로 갈 수 있을 만큼 다리가 길어집니다

 

얼굴은 내 것이지만 타인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구름도 어쩔수 없는 날씨가 있습니다 

저기 뒤뚱거리며 걸어가던 기분이 넘어집니다 
펭귄처럼, 거꾸로, 각별하게 

 


                         —《시인동네》2017년 3월호

----------------

임지은 / 1980년 대전 출생.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및 같은 과 대학원 졸업.  201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