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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 손진은

문근영 2017. 9. 7. 01:19

나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손진은



아, 그 시절 우리 안방 옷장엔
고양이 몇 마리 살고 있었더랬다
그 곁엔 눈초리 또렷한 몇몇 소녀들도

어머니의 손끝에서 태어난 그이들은
대낮의 분주에서 돌아와
밤이면 그곳으로 스며들곤 했던 것이다

옷장 속에서 살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는
내 일기장에도
때론 새벽 내 꿈속에도 옮아붙었다

내 다정한 친구, 이 명상가들은 그러나
밥상에 올라앉거나
그릇을 뒤집진 않았다

헐렁한 시절, 자주 빠지던 가난의 늪
가끔씩 출몰하던 악어 떼에 물어뜯긴
뒤꿈치, 그 휑한 구멍을

어머니는 꽝꽝한 겨울의 한 가운데서
헝겊이나 스웨터 자락에 가녀린 바늘로
고양이, 눈매 이쁜 소녀를 양말의 뒤꿈치에
봄을 부르는 노래와 함께 깃들게 했더랬는데

그 시절의 고양이와 소녀들은
이야기를 짜던 작가가 먼 길 가시고도
내 기억의 서랍 속 불씨
꺼지지 않는 불씨를 물어물어

봄은 온단다, 봄이 오면 뭐할 건데
때로는 말간 눈동자로 속삭이다
이젠 완연한 봄이잖아, 중년 가장 튀어나온 뱃속을 향해
짐짓 어깃장을 놓기도 하는데



                         —《시사사》2017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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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 1959년 경북 안강 출생. 1987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고요 이야기』. 현재 경주대학교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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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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