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
손진은
아, 그 시절 우리 안방 옷장엔
고양이 몇 마리 살고 있었더랬다
그 곁엔 눈초리 또렷한 몇몇 소녀들도
어머니의 손끝에서 태어난 그이들은
대낮의 분주에서 돌아와
밤이면 그곳으로 스며들곤 했던 것이다
옷장 속에서 살던 고양이와 소녀 이야기는
내 일기장에도
때론 새벽 내 꿈속에도 옮아붙었다
내 다정한 친구, 이 명상가들은 그러나
밥상에 올라앉거나
그릇을 뒤집진 않았다
헐렁한 시절, 자주 빠지던 가난의 늪
가끔씩 출몰하던 악어 떼에 물어뜯긴
뒤꿈치, 그 휑한 구멍을
어머니는 꽝꽝한 겨울의 한 가운데서
헝겊이나 스웨터 자락에 가녀린 바늘로
고양이, 눈매 이쁜 소녀를 양말의 뒤꿈치에
봄을 부르는 노래와 함께 깃들게 했더랬는데
그 시절의 고양이와 소녀들은
이야기를 짜던 작가가 먼 길 가시고도
내 기억의 서랍 속 불씨
꺼지지 않는 불씨를 물어물어
봄은 온단다, 봄이 오면 뭐할 건데
때로는 말간 눈동자로 속삭이다
이젠 완연한 봄이잖아, 중년 가장 튀어나온 뱃속을 향해
짐짓 어깃장을 놓기도 하는데
-------------
손진은 / 1959년 경북 안강 출생. 1987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고요 이야기』. 현재 경주대학교 문창과 교수.
관련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엄정옥 원글보기
메모 :
'좋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비아 돌로로사 / 최도선 (0) | 2017.09.07 |
---|---|
[스크랩] 저녁이 올 때 / 문태준 (0) | 2017.09.07 |
[스크랩] 카뮈에게 / 이명수 (0) | 2017.09.07 |
[스크랩] 폭설카페 / 전영관 (0) | 2017.09.07 |
[스크랩] 죄책감 / 강지혜 (0) | 2017.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