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벌거벗은 모자 / 신철규

문근영 2017. 9. 7. 01:01

벌거벗은 모자

 

신철규

 

 

  모자는 언제나 나의 머리 꼭대기보다 높은 곳에 있습니다

  나는 모자의 하수인입니다

 

  모자에서 팔다리가 나오고 몸이 불쑥 솟아납니다

  얼굴은 가장 나중에 나옵니다

  당신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까르르 웃습니다

 

  모자 속에는 많은 것을 숨길 수 있습니다

  늘씬한 미녀

  카이저수염을 기른 독재자

  둥근 민머리

  가끔 얌전하게 숨어 있던 비둘기가 날아가기도 합니다

 

  모자를 쓰면 왠지 편안해집니다

  모자를 쓴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을 걸지 않습니다

 

  모자를 벗으면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

  벗은 모자를 가슴에 안고 굽실거립니다

  걸인들은 자신의 머리맡에 모자를 놓고 엎드립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당신은 모자를 쓰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당신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모자만 떠 있었습니다

  당신은 금방이라도 돌아올 것처럼 모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갔군요

 

  당신이 써놓은 메모를 찢어서 모자에 넣습니다

  다시 손을 넣어 꺼내 보면 나의 심장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공중에 뜬 모자가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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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상』 2014년 봄호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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