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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물사슴의 계절 / 이병일

문근영 2016. 9. 24. 02:25

물사슴의 계절

 

   이병일

 

 

뿔은 늘 두개골 깊은 곳에 있어

뇌의 협곡은 건드리지 않고 머리통을 뚫고 자란다

 

희끗희끗하고 거무튀튀한 순(筍)속엔

더는 갈 곳 없는 몸의 분노들이 모여있다

침묵의 부스럼을 만드는 시간이 잠겨있다

 

그러나 단단하고 유연한 뿔은

죽음보다 높은 곳을 향해

수직의 고단함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자주 공중을 치받아 상처를 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무껍질을 긁어 뿔의 냄새를 숨기곤 했다

 

뿔은 까다로워지기 위해

톡톡 긋는 빗줄기의 감촉을 건드리기 위해

겁 없는 용기를 내비치지 않기 위해

아름다운 나뭇가지 冠을 뒤집어쓴다

 

오늘도 목숨의 깊이만큼 뿔은 들키고 싶지 않아

공중을 쥐고 높이높이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구름 빛으로 번져나간다

해와 달을 찌르고 새를 찔러 어둠을 부른다

 

그때 뿔에 끌리고 뿔에 밀리는 물사슴의 계절이 우거진다

 

 

 

                       —《시산맥》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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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2007년 《문학수첩》시 등단. 2010년 〈조선일보〉신춘문예 희곡 당선. 시집『옆구리의 발견』.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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