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스크랩] 폐문 / 이현호

문근영 2016. 9. 23. 15:11

폐문

 

   이현호

 

 

 

내복을 입고 외투의 단추를 여미며 나는 나를 생활했다.

떨켜라는 말을 모르고도 떨어질 때를 알고 있었던 지난 계절

그 낙엽의 거리를 다시 거닐며 나는 나를 생활했다

어묵 국물을 두 손에 꼭 쥐고 먹먹한 하늘의 강설을 점치다가

옥상에 널어둔 빨래의 안부를 걱정하며 나는 나를 생활했다

지구와 태양이 가까워지면 겨울이 오는 북반구의 나라에서

자전축처럼 비스듬히 기울어 있던 등을 잠시 떠올리며

멀리까지 뻗어나가는 겨울 햇빛을 맞고 있는 나를

나는 생활했다, 나는 나를 생활했으므로

 

나를 떠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생각하던 나를 떠난 것이다

날 위한 한 줄 문장을 끄적이고

술잔에 흔들리는 눈빛을 마시며 나는 나를 생활했다

통증은 잊지 말라는 신호라며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잊었을 거라고 다독이는

나를 나는 생활했다, 출렁이는 눈으로 문장을 고쳐 쓰는;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으려는 나를 떠났다

퇴고할 수 없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다시 읽는;

당신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생각했던 당신을 떠난 것이다

 

나를 나는 생활했다, 닫힌 문 앞을 되돌아

가로등 불빛들을 장마의 징검다리같이 건너는,

철학의 대가들이 삶의 전문가는 아니라고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내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사랑스런 영혼에게 이 폐문을 덮어주었다

나는 나만을 생활했다, 다른 누구도 생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잠시도 당신의 집 앞을 서성이지 않는다

 

 

 

                         —《문학동네》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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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 1983년 충남 전의 출생. 2007년 《현대시》신인상으로 등단. 시집『라이터 좀 빌립시다』.

출처 : 작가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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