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영혼

[스크랩] 유태영 목사의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사 (1) 남미의 해방자 -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문근영 2016. 7. 16. 07:50

남미의 해방자-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차베스 지지율이 갈수록 높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태영 목사

미국의 코 밑에서 반미반제를 외치며 급부상하고 있는 남아메리카. 그 중심에는 베네수엘라가 있으며 베네수엘라의 반미반제를 선도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다. 부시 미 대통령에 대한 공격에 거침이 없으며 베네수엘라 국민들로부터 갈수록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차베스 대통령은 성공한 좌파정권의 표상이 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변화가 세계적 관심이 되고 있는 지금, 유태영 목사(범민련 재미본부 고문)은 <평화통신> 기고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역사 속에서 반미반제 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의 역사와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깊이 있는 식견을 펼쳤다. 이에 이 글을 싣는다. 
 


유태영

 

 

 

 

 

 

 


 

 

 

< 유태영 목사 >

우리나라 속담에 “x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 본다”라는 말이 있다. 1400년대에 북아메리카를 침략한 영국의 침략자들은 주장하기를 “우리는 자유의 추구자들이다. 하지만 저 남아메리카로 향한 스페인 사람들은 황금의 추구자들이다”라고 흉을 보았다고 한다.


“Freedom Seeker”와 “Gold Seeker”의 차별을 주장하면서 “우리 영국인들은 저 스페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역설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침략자의 변명인가? 침략에 무슨 우월이 있단 말인가?


자유의 추구자라고 주장한 영국을 주축으로 한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가지고 온 종교는 개신교(Protestant Church)였다. 하지만 황금 욕심으로 눈이 어두워진 황금의 추구자라는 누명을 달고 남아메리카로 향한 스페인계의 식민주의자들이 가지고 온 종교는 천주교(Catholic Church)였다. 그러므로 남미로 향한 스페인 침략자들의 식민정책은 보다 더 권위주의적이었고 보다 더 엄하고 보수적이어서 무조건적인 종교적 복종을 원주민들에게 강요했다.


어쨌든 남미에서 침략의 발걸음을 시작한 스페인 식민주의 침략자들의 “황금의 추구”의 행동은 오만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스페인과 포도아인들이 먼저 대량으로 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영국, 벨기에, 불란서인 등 많은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이 줄을 이어 남미를 침략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식민주의 침략자들이 저지른 만행은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만행에 못지않게 잔인무도 하였다. 남미의 인디안족을 비롯한 모든 토착종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노예화 할뿐만 아니라 싸우다가 패배하고 겨우 살아남은 인디안과 토착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빈몸으로 밀림속으로 쫓겨 가야만 했다.


노예상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노예를 대량 실어와 남미 침략자들에게 판매하여 10배의 이익을 보았으며 흑인노예 1명에 $5로 판매하였다.


베네수엘라가 스페인 침략자들의 눈에 노출되기 시작한 것은 1500년대 초에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성급한 스페인 침략자들은 베네수엘라에 묻혀 있는 풍부한 지하자원과 지상의 풍요로운 천연자원에 대하여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고 그들은 보다 더 큰 것을 탐험하려고 타 지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후로부터 약 100년이 지나서야 스페인 침략자들은 베네수엘라에 다시 돌아와 농산물들을 착취하여 유럽으로 수출하기를 시작했는데 코코아, 밀, 가죽 등을 수출했다.


하지만 그 때 스페인의 왕은 식민지에서 농산물보다는 금광석 등 지하자원의 획득을 더 원하고 있었다.


1749년경에 베네수엘라를 침략한 스페인 침략자들은 베네수엘라 땅에 스페인의 뿌리를 내리면서 유럽에 있는 스페인 왕권정부 사이에 상호 불화와 분규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약 50년후인 1800년대 초부터 베네수엘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에 성공한 침략자들은 이제는 본국정부인 스페인 왕권정부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주독립을 원했고 독립을 위하여 민중운동을 시작 했다.


1811년 12월21일에 드디어 스페인 침략자들은 Miranda의 영도하에 베네수엘라 식민지 역사 300년을 마감하고 공식적으로 베네수엘라를 스페인 본국정부 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는 최초의 독립헌장을 채택하고 선포했다. 하지만 Miranda는 1816년 7월25일에 독립을 완강히 거부하는 스페인 왕정에 의하여 체포되고 투옥되었다가 옥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Miranda 사망 후 약 100년 동안 베네수엘라 독립주의자들은 스페인 본국의 왕정에서부터 이탈하여 남미에 자주자립하고 독립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장엄한 투쟁의 행진을 그칠 줄 모루고 줄기차게 계속 했다.


베네수엘라의 역사를 대략 4기로 나누어 본다.


제1기 스페인 식민통치 전성기(1526년 – 1800년)
제2기 스페인 식민통치에서부터 벗어나려는 독립운동기(1800년 – 1830년)
제3기 베네수엘라 내부의 인종 간 평등과 민주화 투쟁기(1830년 – 1900년)
제4기 미국 제국주의 외세침략과 반미반외세 투쟁기(1900년 - )


베네수엘라 역사를 4개의 단위로 나눈 년대에 다소 오류가 있음을 시인한다. 하지만 이 글의 뜻은 제4기에 속하는 1900년대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침략하는 외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반미 반외세 투쟁 역사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바란다.


지금까지 베네수엘라의 오랜 역사는 스페인 침략자들이 인디언 원주민과 모든 토착종족들을 살해하고 추방한 침략의 역사였다. 그리고 침략에 성공한 스페인 침략자들은 멀리 유럽에 있는 스페인 왕권통치에서부터 벗어나 자주독립을 하기위하여 줄기차게 싸워 온 독립투쟁의 역사였다. 그리고 또한 독립을 한 후에 베네수엘라 내부에서의 인종간의 불화와 계급투쟁의 역사였다.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서서 베네수엘라의 역사는 미국 제국자본주의자들이 베네수엘라를 경제적으로 약탈하고 예속화 하려는 제2의 침략자들과의 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네수엘라의 옛날 역사는 인디언과 토속원주민을 마구 침략하는 침략자로서 가해자의 역사였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베네수엘라의 역사는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싸워야 할 피침략자로서의 항쟁의 역사인 것이다. 즉 가해자의 위치에서 피해자의 위치로 바꾸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스페인 혈통과 기타 유럽계 백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오늘의 베네수엘라의 부유층에 속하는 소수의 엘리트 권력자들은 베네수엘라 민중의 소중한 안전과 인권을 빼앗고 희생시키면서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교묘하게 결탁하여 백인 조상들이 침략시대에 획득한 그 오래된 옛날의 기득권과 유산들을 끝까지 지키고 옹호하려고 친미 친제국주의 추종의 노선을 적극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나라 안에서 도전해 오는 백인 침략자 후손들의 부유층 기득권 세력과 싸워야 함과 동시에 또한 다른 한편 나라 밖에서부터 도전해오는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과의 투쟁을 동시에 전개해야 할 이중의 무거운 짐이 양어깨에 지워져 있는 것이다.

대내적으로는 민중의 평등과 민주화를 위하여 백인 기득권 엘리트 세력과 싸워야 하며, 대외적으로는 자주와 자립을 위한 반미 반외세와 벅찬 투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1. 반미반제의 선봉자 키프리아노 카스트로 대통령

키프리아노 카스트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1899년부터 1908년까지 9년간 집권하면서 베네수엘라의 역사상 처음으로 반미반제 정권을 수립하는데 선봉자 역할을 했다.
그는 인디언의 혈통과 토착종족의 혈통인 두 혈통을 이어받은 지도자다. 그는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엄청난 시련과 위험속에서 투쟁을 하였다. 그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카스트로 대통령을 “작은 고약한 원숭이” 라고 멸시했으며 기회만 허락되면 베네수엘라를 침공하겠다고 공공연히 엄포를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트로 대통령은 굳건히 서서 미국의 이익에 종사하는 친미 자본을 차단하고 봉쇄할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에서 미국으로 원자재들을 수출하는 백인 수출업자들에게 금지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베네수엘라의 백인 권력자들이 미국의 거대한 지본과 결탁하여 이득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지난 시기에 있어서 오래동안 계속된 양국의 역사적 흐름과 맥락에 대하여 비주류에 속하는 혼혈출신의 카스트로 대통령이 혜성처럼 나타나 잘못된 역사의 흐름을 차단하고 바르게 흐르도록 전환시켰다는 것은 그때 베네수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국무장관 엘리후 룻 은 카스트로 대통령에게 “미친 야수” “버르장머리 없는 놈” “왜소한 검둥이” 라고 하면서 온갖 모욕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유일한 희망은 베네수엘라의 상류층 세력들이 봉기하여 카스트로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고 반란을 일으키기를 바라고 있었다. 백인 상류층의 지원이 끊기면 카스트로 대통령은 자연히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리라고 미국은 장담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때에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베네수엘라의 백만장자 안토니오 마토스가 미국을 등에 업고 카스트로 대통령을 축출하기위한 반정부 음모를 전개했다. 하지만 마토스의 친미적인 반정부 소동은 2년동안에 12,000명의 희생자만 냈을 뿐 실패하고 말았다.


마토스의 실패를 보고 미국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미국은 또다시 뒤에서 베네수엘라에 내분을 조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분에 직접 개입하여 이번에는 미군이 직접 나서서 베네수엘라의 카스트로 대통령을 강제로 납치하였다. 납치를 당한 카스트로 대통령은 건강상 이유라는 핑계로 저 멀리 유렵 영국으로 보내졌고 미군은 카스트로의 귀국을 영구히 봉쇄했다.


1909년에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친미적 부유층에 기반을 두고 있는 빈센트 코메즈를 임시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세웠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직접 세워 놓은 과도정부의 수반인 코메즈는 오직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하수인으로서 미국에 충성할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민중에 대해서는 무서운 독재자로 군림했다. 코메즈의 무서운 독재는 거의 30년을 계속하다가 1935년에 그의 사망으로 끝났다.


코메즈가 무서운 독재를 하고 있는 그 시절에 베네수엘라에는 놀라운 변화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1920년대에 베네수엘라에서 석유가 처음 발견된 일이었다. 석유의 생산과 독재자와 미국의 자본주의적 석유회사와의 상호관계는 베네수엘라의 정치적 운명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 뿐이었다. 코메즈 대통령은 30년 독재를 끝내고 사망했지만 그 후 계속되는 군부의 쿠데타로 베네수엘라의 민주화의 앞길은 점점 더 멀고 멀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민중은 반미반제의 기치하에 민주화에 적극 나서는 새로운 시대적 사명에 들떠 있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베네수엘라 민중속에서 “생동하는 민주운동”(AD)이라는 선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빈민들이 선거에 참여할 의욕이 생기고 18세 이상의 남녀는 누구나 다 선거권이 부여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1948년 2월15일에 “생동하는 민주운동”(AD)의 순풍속에서 갈레고스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유권자 3/4이 선거에 참가하여 73%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갈레고스 대통령은 석유재벌에게 정당한 세금을 부과하고 그 돈으로 빈민들을 구제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이런 정책이 백인 기득권층과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석유 재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리가 없었다.


갈레고스 대통령은 절대다수 민중의 지지로 대통령에 추대됐음에도 불구하고 취임한지 10개월 만에 미국에 의한 3명의 군장교들이 주도한 무혈쿠데타로 인하여 외국으로 추방되는 운명에 이르렀다. 쿠데타를 일으킨 3인 군인중에서 델가도가 주도하는 군사정권이 친미적인 노선으로 베네수엘라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델가도는 극단적인 극우파 세력과는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중도적 노선을 유지하려 했다. 이에 대한 불만을 품은 3명중 한 사람인 페레즈에 의하여 1950년11월에 델가도는 암살로 쓰러지고 말았다.


페레즈는 베네수엘라의 모든 정치활동을 정지시켜 놓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 임명하는 무서운 독재자가 됐다. 쿠데타를 함께 일으킨 3인중에서 두 사람을 암살과 추방으로 깨끗이 제거한 후에 혼자 남은 페레즈는 스스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됐고 또 무서운 독재자가 됐던 것이다.


페레즈는 석유로 벌어들인 돈으로 민중은 외면하고 NEW YORK’S ROCKEFELLE CENTER를 비롯하여 최고급 HOTEL등 미국내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으며 개인 구좌에도 $250 MILLION을 가지고 있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으며 1954년에는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공훈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1957년에 형식적으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기는 했지만 시민투표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페레즈 대통령은 긴급 조치를 발동하고 형식적으로 국민투표라는 비상수단을 써서 투표 후 2시간 만에 85%로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독재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군민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하였는데 1958년 1월1일에 공군 비행기 한대가 수도 카라카스에 폭탄을 투하하는 큰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전국적으로 민중의 데모와 파업이 휩쓸었으며 견디다 못해 1957년 1월23일에 독재자 페레즈 대통령은 미국으로 도망쳤다. 페레즈의 축출로 인해 300명의 사망자와 1,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페레즈의 8년 독재가 끝난 후에 군부와 민간단체 사이에는 혼합과 분쟁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민주적 공명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대원칙에 합의함으로서 베네수엘라의 역사상 처음으로 3개의 정당 단체를 대표하는 3명의 후보자를 놓고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생동하는 민주운동” 단체를 대표하는 베타코오트가 49%의 득표를 얻음으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베타코오트는 1959년 2월13일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베타코오트 대통령이 비록 민선에 의하여 정권을 잡았다 할지라도 친미 기득권 엘리트들의 노골적인 저항과 미국의 끊임없는 간섭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자주와 민주화를 원하는 대하의 흐름은 절대로 그치지 않고 계속 흘렀다.


1973년에 칼로스 페레즈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베네수엘라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적 성향을 지닌 정치가로서 석유의 횡재를 활용하여 사회복지사업에 투자했으며 미국의 손 아래에서 벗어 남미의 이웃 나라와의 수교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또 그는 그 당시 “사회주의 국제회의”의 부회장이 되기도 했다.


칼로스 페레즈 대통령은 1973년에 취임하여 1988년까지 비교적 안정된 장기 집권을 했으나 말년에 이르러 석유 값의 폭락과 그가 획득한 카리스마가 쇠퇴됨으로 인하여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의 네오콘이 강요하는 IMF로 인하여 친미정책을 강행 할 수밖에 없게 되자 민심은 소란해지고 드디어 폭동이 발생했다.


차베스 중령이 쿠데타를 시도한 때가 바로 이때다다. 1992년 2월에 차베스 당시 중령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구속되었다. 2년만에 석방된 후 차베스는 “제5공화국운동”을 창당하고 1998년에 대선에 도전하여 56%의 득표로 페레즈 정권을 물리치고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차베스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배후에서 미국이 개입한 실패한 쿠데타로 인하여 긴장했으며 또한 역시 미국이 개입한 대통령소환투표라는 소동으로 인하여 7년의 집권 기간은 실로 고전분투의 기간이었다.


그리고 2006년 12월 3일에 실시한 대선에서는 62.87%의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아 3선의 대통령이 됐다.


지금까지 1900년대에 들어서서 베네수엘라의 주요 정치 변동 과정들을 대략 살펴보았다. 1900년대 초에 미국의 “뒷마당” 베네수엘라에서 반미 반제 운동의 선봉자로 키프리아노 카스트로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로 약 100이 지난 2006년 12월3일에 오늘은 미국의 “앞마당”이 되고 있는 베네수엘라 에서 21세기의 반미 반제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자인 차베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다.


 

 
2. 베네수엘라의 성숙한 민주화

 

전 세계에서 모인 수백명의 참관인들이 가까이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대통령 선거는 75%의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가했으며 62.87%의 높은 지지율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으로 재선에 승리했다. 이번 선거는 베네수엘라 역사에서 처음 보는 성숙한 민주화의 모습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미국 CIA는 색안경을 끼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베네수엘라의 선거를 감시하면서 방해할뿐만 아니라 보수언론들은 총공세로 선거의 진행을 불투명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선거의 결과에 대하여 미 국무부는 논평을 통하여 “차베스 대통령은 대선에서 깨끗하고 확실하게 승리했다”라고 발표 할 수밖에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1920년 이후 6명의 미국대통령들이 획득한 득표율을 비교해 보면 이번에 실시한 선거에서 차베스 대통령이 획득한 득표율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이다.
서방의 언론들은 차베스 대통령을 인기 영합 대중주의자라고 격하하는 논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의 인기 요인은 풀뿌리 민중과 함께하는 “참여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고 토지노조와 공동체 공동경영 등 민중의 정치 참여를 주창하는데 인기의 기본적 요인이 있다.


차베스 대통령은 자원의 국유화를 선언함으로서 미국의 자유무역 주의자들을 정면으로 들이박고 있다. 이와 같은 차베스 대통령의 인기 요인은 미국의 네오콘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3. 차베스 대통령의 종교
 
차베스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후에 처음 맞이하는 일요일 오후에 대통령 관저전망대 밑에 모여 축하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한 이는 예수이다.”


도대체 차베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차베스는 계속해서 그의 고백적인 말을 다음과 같이 또 했다.


“예수의 나라는 사랑과 평화와 정의의 나라이며, 그리고 단합과 형제애와 사회주의의 나라이다. 예수의 나라야 말로 앞으로 베네수엘라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21세기의 사회주의적 나라인 것이다. 나는 예수가 아니며, 나는 또 예수와 같아 질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베네수엘라가 예수의 나라처럼 될 수 있도록 힘을 쓸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이 주장하는 예수의 나라는 19세기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웠던 Simon Bolivar 정신을 이어 받은 혁명적 개혁정신을 뜻한다. 차베스 대통령이 역설하고 있는 21세기의 사회주의 나라 건설의 꿈은 남미의 나라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미국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역설적으로 카톨릭 신자인 차베스 대통령은 보수주의적 기독교의 신자라고 자처하는 부시 대통령보다 일요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성적이 좋지 못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차베스는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번, 그것도 유엔 총회의 연설 석상에서 부시를 향하여 “악마” 또는 “악마의 악취”라고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이에 대하여 부시는 지금까지 아무 응답을 못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은 지난 7년간 사회적 복지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석유의 자원을 제도적으로 관리운영하도록 시도했으며 앞으로 6년 동안의 임기에는 예수정신에 기초하고 기독교의 기본 윤리에 기초한 사회주의 복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가의 모든 자원을 투자하겠다고 3선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가족과 국민과 하나님께 맹세를 했다.


그런데 입으로 하나님 하나님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차베스가 아니고 부시다. 부시 행정부의 과거사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 있어도 미국은 남미 여러 나라들에게서 미국의 이득을 더 많이 얻기 위하여 군사적 힘으로 지배하고 강요하는 침략적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는 세계의 양심은 도대체 “부시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고 의심을 품게 한다.


지난 100년 동안 베네수엘라의 역사는 미국의 석유식민지 역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지금 차베스 대통령이 “예수의 나라”를 주장하고 있는 그 이유는 지난 100년 동안 미국이 감행한 석유식민의 어두운 역사에 대한 심판이다. 그리고 스페인 침략자들이 가지고 온 카톨릭 교회와 그 전통에 대한 현실적인 종교적 마찰인 것이다 .


차베스 대통령의 종교는 해방의 종교이다.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예수의 나라”는 민중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우익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기독교의 깊은 메시지를 새롭게 입증하려는 참된 “예수의 나라” 정신에 기초한 민중 운동인 것이다.

4. 민중의 영웅 차베스 대통령


차베스 대통령은 1954년 7월28일에 베네수엘라의 사바네따라는 시골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차베스 대통령을 민중의 영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차베스는 유년 시절에 시몬 불리바르 장군의 전기를 읽고 어려서부터 백인 강자들의 횡포로 인하여 베네수엘라의 토착원주민들과 서민농민들이 죽도록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수성이 강한 소년 차베스는 볼리바르 장군의 통치철학은 베네수엘라의 가난한 민중들에게 꼭 필요한 혁명적 사상이 되리라는 것을 소년 시절에 벌서 깨닫고 있었다,


소년 차베스에게 그렇게도 큰 감명을 준 볼리바르 장군은 어떤 인물인가? 볼리바르 장군은 1800년대 초부터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예해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농민들에게는 토지무상분배 정책을 감행한 혁명가 이였다. 볼리바르 장군은 노예와 흑인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제도를 설립하기도 했다.


볼리바르 장군은 주장하기를 “사회개혁 정책은 서두르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추진해야하며, 극빈자에게 고기를 주는 것보다 고기를 잡는 그물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리바르 장군은 사회개혁 정책을 남아메리카 전역에 확대시켜서 대륙 전체에서 민중해방 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볼리바르 장군은 그 당시의 영웅으로 추대될뿐만 아나라 오늘도 남미 민중 해방 운동권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영웅이다.
그러면 차베스 대통령은 이와같은 “볼리바르 혁명사상”을 이어받아 제일 먼저 실행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차베스 대통령은 지금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미주대륙자유무역지대협정”(FTAA)에 대하여 반대해야 하는 것이 오늘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에서 뿐만 아니라 남미 전체와 제3세계가 함께 연대하여 FTAA 반대운동을 전개하도록 선봉을 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베스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에서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국유토지와 악덕 부호 정치인들이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있는 농지 150만 헥타르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 분배함으로 개혁의 첫 발걸음을 시작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약 120만의 농민들이 처음으로 자기땅을 소유하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지난 7년 동안 교육부분과 국민복지 분야에는 베네수엘라 역사상 볼 수 없었던 빠르고 놀라운 변화를 보였다. 극빈자와 실업자 수도 크게 줄어드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시간과 인내는 차베스 대통령의 개혁 운동에 있어서 성패의 원인이 될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볼리바리안 대안”(ALBA)이라는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인종과 계급을 초월한 의료 혜택과 문맹퇴치 운동에 국력을 최선으로 투자할 것을 천명한 대안이다. 민중은 그 누구나 인격을 지녔으며 인종과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회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도록 재도를 세워야 한다고 ALBA는 주장 한다.


차베스 대통령은 빈민들이 병원에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위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료의료제도를 정착시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차베스 대통령은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쿠바에서 의사 4만명을 초빙하여 베네수엘라 지방 전역에서 의료봉사를 하도록 배치했다.


이와같은 대안계획(ALBA)으로 인하여 오늘 베네수엘라는 국민 70%가 무료로 의료혜택을 받고 있으며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고 전국민이 모두 다 무료로 의무교육의 혜택을 받고 있다.


베네수엘라에는 뿌리깊은 백인 엘리트그룹으로 형성한 권력층이 있다. 이 권력층은 수백년동안 조상으로부터 유산으로 이어 받은 이권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미국의 신보수주의와 결탁하여 차베스 대통령의 정치쳘학을 무섭게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농민서민들과 토착원주민들과 흑인들을 포함한 민중들은 지금까지 한번도 상상하지 못한 인간 대우와 사회의료복지 및 의무교육 혜택 등 놀라운 역사적 변혁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 베네수엘라의 민중들은 의식의 변화와 국가에 대한 의욕적 보답으로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져서 80%로 육박하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은 민중들의 빈곤문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회개혁을 우선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혁명가로서 물질적인 빈곤 문제 못하지 않게 정신적인 빈곤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차베스 대통령은 엄청난 독서를 통하여 문학과 철학, 정치와 경제 그리고 특히 라틴문학에 통달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카리스마는 그의 높은 꿈과 정신력과 그리고 풍부한 지식에 근거해 있다.


차베스 대통령은 카라카스같은 큰 도시에서 또는 저 아마존 밀림지대처럼 미개한 지역에서 언제든지 교육기관과 학교 건축 준공식에 참석할 때는 군중을 향하여 “공부와 독서”를 강조한다. 가난과 빈곤을 해결하는 길은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지성은 절대적 필수적 조건이라고 차베스 대통령은 항상 역설한다.


차베스 대통령은 자기 자신을 베네수엘라의 평범한 시민 중의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직을 맡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과 여론에 의하면 그는 틀림없이 베네수엘라 뿐만 아니라 남미와 전세계의 제3세계 민중들에게까지도 영웅적 지도자로 추앙을 받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는 그가 어렸을 때 독서를 통하여 감명받은 “볼리바리안 혁명” 의 정도를 지금 힘차게 달리고 있는 것이다.

 
기사입력: 2007/01/30 [15:22]  최종편집: ⓒ 자주민보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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