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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외솔 최현배 선생이 수학한 일본 교토대학을 가다

문근영 2016. 5. 18. 02:21

 

외솔 최현배 선생이 수학한 일본 교토대학을 가다

외솔이 공부한 강의동 앞에 작은 기념비라도 세웠으면
 
김영조
 
▲ 외솔 최현배 선생, 서울 동국대 들머리에 있는 외솔 기념비     ? 김영조

봄맞이 반긴 뜻은 임 올까 함이려니
임을랑 오지 않고 봄이 그만 저물어서
꽃 지고 나비 날아가니 더욱 설어 하노라“
 

위 시는 외솔 최현배 선생이 쓴 옥중시조이다. 

세종대왕이 세계 최고의 글인 한글을 만들었다면 외솔 선생은 그 최고의 글을 갈고 닦은 분이다. 외솔 선생은 해방 뒤 교과서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하고, 우리말 문법서의 고전으로 인정받는 저서 ≪우리말본≫을 토대로 한글을 더욱 발전시킨 이 시대 최고의 한글학자이다. 

몽골 울란바토르대 석좌교수인 “외솔회” 최기호 회장은 “‘글자의 혁명’,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우리말본’, ‘나라 사랑의 길’, ‘민주주의와 국민도덕’ 같은 20여 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한 끊임없는 창의적 연구와 우리말 글 펴기에 앞장서서 한글문화창조, 한글 과학화, 한글세대 형성에 크나큰 이바지를 하는 등 평생 겨레와 나라 사랑의 소신을 굽힘없이 펼쳤다.”라며 외솔을 기린다.

선생은 1922년 나라 잃은 설움을 새기며 좀 더 배우는 것이 일본을 이기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일본교토대학(당시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한다. 지난 10월25일 기자는 외솔 선생이 수학한 일본교토대학을 찾아 80여 년 전 외솔 선생이 조국을 빼앗긴 한을 품고 걸었을 요시다캠퍼스 주변과 학교 안팎을 돌아봤다.

교토대학은 요시다(吉田)캠퍼스, 우지(宇治)캠퍼스, 카츠라(桂)캠퍼스 등 3개의 캠퍼스가 있는데 이 가운데 교토시 사교쿠 요시다혼마치(京都市左京吉田本町)에 있는 요시다캠퍼스가 본부이며, 바로 이곳이 외솔이 공부한 곳이다.   

 
▲ 소탈한 교토대학 요시다캠퍼스 정문     ? 김영조
   
▲ 교토대학 요시다 캠퍼스 지도, 붉은 빛깔로 동그라미를 친 부분이 외솔이 공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학부진열관     ? 김영조

요시다캠퍼스 정문은 한국 대학들과는 사뭇 다르게 육중하지도 않고 소박한데다가 정문에는 작년 성탄절에 붙여 놓은 듯한 빛바랜 반짝이와 양말 몇 켤레가 한해 가까이 걸려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치우지 않는다. 그것이 대학의 권위를 손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들의 생각이 신선하다.  

수위실에서 캠퍼스지도를 한 장 받았다. 거기엔 각 건물이 언제 세워졌는지도 자세히 쓰여 있다. 먼저 외솔이 공부했을 문학부 건물을 찾았다. ‘문학부진열관(文學部陳列館)’이란 이름으로 된 건물 이 보인다. 등록유형문화재로 1914년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3년에 세워진 정문, 1903년 세워진 존양당(尊攘堂)을 빼면 가장 오래된 건물로 대학 관계자 시미즈(淸水)씨는 이곳에서 당시 문학부 수업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 외솔 선생이 공부했을 교토대학 요시다 캠퍼스 안의 문학부진열관 건물 앞에서 잠시 외솔이 되어본다.     ? 김영조

▲ 외솔 선생이 걸어 다녔을 문학부 앞길     ? 김영조
 
 외솔 선생이 유학 와서 공부했을 강의동 앞에 서니 갑자기 코끝이 찡하다. 80여 년 전 나라 잃은 조국의 청년 외솔은 이곳 요시다캠퍼스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당시의 외솔 선생이 되어 이리저리 캠퍼스를 둘러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외솔이 공부하면서 거닐었을 교토 요시다캠퍼스는 지금 여기저기 오래된 건물의 개보수 공사로 시끄럽다. 오래된 세월의 흔적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캠퍼스 안을 거닐다 찾아간 곳은 본관 건물 안에 있는 교토대학문서관이었다. 

이곳은 교토대학이 걸어온 길을 사진과 함께 전시하고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으며 한쪽에는 대학의 학적부를 비롯한 각종 문서가 잘 정돈된 곳이다. 

   
▲ 교토대학문서관 입구     ? 김영조
 
 
▲ 교토대학 문서관 안 박물관의 1920년 당시 문과대학 사진     ?김영조
기자가 이곳을 찾은 날이 마침 토요일이어서 담당자는 없고 당번을 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부러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을 위해 교토제국대학이 발행한 ≪경성제국대학일람(京都帝?大?一?)≫을 꺼내 놓고 “조선유학생 최현배”의 학적 기록을 찾았지만 담당자가 아닌 탓에 역부족이었다. 교토대학을 찾은 다음 날이 귀국 날이라 하는 수없이 담당자 이름만 확인하고 물러서야 했다.

귀국 후 부랴부랴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이 교토대학문서관 시미즈요시히토(?水善仁) 씨와 몇 차례 국제전화를 한 끝에 누리편지로 받은 답은 다음과 같았다. “교토제국대학이 발행한 ≪경성제국대학일람(京都帝?大?一?)≫ 을 확인한 결과, 1922년(대정 11) 입학하여 1925년(대정 15년) 졸업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기간 최현배 씨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재적이었습니다.”라는 답을 받았다.

   
▲ 교토대학문서관 담당자에게서 받은 ≪경성제국대학일람(京都帝?大?一?)≫ 사본, “최현배 조선”이라고 분명히 쓰여 있다.     ? 교토대학문서관

그간 국내 인터넷 누리집에 나와있는 외솔 선생의 약력은 교토대학 유학 관련 부분이 “학부”인지 “대학원”인지 어정쩡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번 교토대학 문서관 시미즈씨의 “학적확인”으로 확실해졌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 이곳 교토엔 외솔 선생 말고도 일제강점기 유학왔던 윤동주 시인이 있는데 그가 1년 남짓 공부한 동지사대학에는 이를 기념하는 시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에게 윤동주 시인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해준다.  

윤동주 시비는 수학하던 동지사대학 캠퍼스 안은 물론이고 그가 잠시 살았던 하숙집이었던 곳인 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 타카하라(高原)캠퍼스에도 작은 시비를 세워 그를 기념하고 있다. 말하자면 윤동주시인이 걷고 호흡했던 곳이면 그 어디에도 그를 기념하고 싶은 것이다. 

이에 견준다면 평생을 우리말 글살이에 바친 외솔 선생의 교토대학 시절을 기억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외솔 선생이 공부하던 강의동 들머리에 “한말글을 사랑하던 외솔 선생 이곳에서 빼앗긴 조국을 그리며 수학하다.”라고 쓴 작은 기념비라도 세워 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최근 울산에는 외솔 선생의 생가가 복원되고, 기념관이 세워져 준공식만 기다리고 있다. 외솔 선생이 태어난 울산은 외솔의 성지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데 4년이나 수학한 교토대학에 외솔의 흔적이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씁쓸하다.  

교토대학에서 발행한 <교토대학개요>를 보면 최근 5년간 교토대학에 유학한 한국인 학생 수는 2006년 192명, 2007년 197명, 2008년 209명, 2009년 5월 현재 208명으로 적지 않은 수재들이 교토대학에서 공부하고 있건만 한국의 위대한 인물 외솔 선생이 자신들의 선배였음을 아는 학생은 적을 것이다.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바로 그를 조금이라도 기억하기 위한 작은 마음의 표시가 아닐까?
  

▲ 교토대학 문서관 안 박물관의 1920년 당시 공부방 재현     ? 김영조

<미사봉말글샘터>에는 “귀감”이란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그분이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의 일입니다. 선생의 집 앞마당은 항상 깨끗했습니다. 매일 새벽에 와서 마당을 쓸고 가는 낯선 청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그 청년에게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습니다.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보시고 굶으면 낫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시고는 혼자는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고 하시면서 하루 종일 정성껏 돌봐 주셨습니다. 아무도 돌봐 주는 사람 없는 감옥 속에서 받은 그 은혜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는 처지라 선생님의 집 마당이라도 쓸어 드리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외솔 선생은 학자 이전에 이런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이제라도 선생을 재조명하여 후손인 우리가 선생의 철학을 본받고 선생이 가신 길을 따라 걷도록 해야만 할 일이다. 그런 점에서 교토대학 문학부 건물 앞에 선생의 작은 기념비를 세우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출처 :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글쓴이 : 김영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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