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던 길 멈추고

[스크랩] 경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문근영 2015. 5. 25. 00:34

경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



전경


근경



건물지


탑지


초석


귀부










지정 번호; 사적 8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35-2 낭산

지정일; 1963121

시대; 통일신라 문무왕 19(679)

분류; 절터

내용; 경주 사천왕사지는 경주시 배반동의 낭산(사적 163)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사적 181) , 선덕여왕릉(사적 182) 아래에 있다. 674(신라 문무왕 1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계림 도독부(鷄林都督府)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이 명랑법사(明朗法師)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 비법(文豆婁秘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679(문무왕 19) 5년 만에 절을 완성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지정 면적은 12,840[3,890]이다.

  사천왕사지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의 절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가장 먼저 창건된 사천왕사는 신라 불교의 호국적 속성과 신라인들의 불교관 및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가람은 금당 터의 앞에 동서로 목탑을 세웠으며 금당의 북쪽 좌우 목탑과 대응되는 곳에는 경루(經樓)를 두었다. 금당 터는 주춧돌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주춧돌에 의하면 정면 5, 측면 3칸 건물이며, 건물 터의 중간 부분에 불좌대의 지대석(地臺石; 바닥돌)으로 추정되는 장대석(長臺石; 길게 다듬어 만든 돌)이 남아 있다. 동탑 터는 130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으며 사방 3칸으로 주춧돌이 남아 있다. 탑 터의 중앙에는 118내외 크기의 심초석(心礎石)이 남아 있는데 사리공(舍利孔)이 있다. 서탑 터는 동탑 터와 동일한 형태로 심초석의 사리공도 같은 크기이다. 탑 터의 앞에 중문, 금당 터의 북쪽에는 강당 터가 있고 이들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廻廊) 터가 있다. 절터에는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龜趺) 2, 비신(碑身), 높이 2.4m1기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 있다. 절의 동편에 남아 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 수법과 등에 새겨진 음각(陰刻; 뚫을새김) 등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무열왕릉의 귀부에 버금가는 뛰어난 것이다. 이 절에는 경덕왕(景德王) 때에 도솔가(兜率歌), 산화가(散花歌) 등의 향가를 짓고 피리를 잘 불어 달이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대사(月明大師)가 있었다.

특기 사항;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忉利天)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 만에 왕릉 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須彌山)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佛國土)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 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 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 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 도솔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고승 월명(月明)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야기 1; 당나라에서 돌아와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는 나라를 위하여 걱정하고 있는 문무왕께 아뢰기를 신라를 삼키기 위해서 물러가지 않는 당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신라는 반란을 일으키는 고구려 군을 도와주고, 한쪽으로 백제에 머물러 있던 당나라군을 무찌르고 있기 때문에 당나라의 고종은 왕제 김인문(金仁問)을 위시하여 많은 신라 사람들을 옥에 가두고 문초하고 있습니다. 소승이 돌아올 때, 감옥에 갇혀 있는 김인문 각간(角干; 신라 때의 최고 관위로 1/17관등)을 문안하고 왔습니다. 그때 지금 당나라에서는 신라를 치려고 군사 50만 명을 교련시키면서 군함을 만들고 있는 중이오니 귀국하거든 임금께 아뢰어 하루 속히 대처해야 될 것이라고 비밀리 소승에게 말했습니다.” 라고 보고했다. 보고 받은 문무왕은 크게 걱정되어 여러 신하들을 불러 당나라의 침입을 막아낼 계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말했다. “요사이 명랑법사가 서해 용궁에서 설법하고 돌아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왕은 명랑법사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법사는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고승들을 모아 문두루의 기도를 올리면 영검이 있을 것입니다. 사천왕은 호국신입니다.” 라고 절을 세울 것을 권했다. 바로 이때 당나라에서 50만 대군이 신라를 치기 위해서 서해로 건너오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대왕과 신하들은 당황했다. 그러나 명랑법사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일이 급하오니 절을 세울 겨를이 없습니다. 헝겊으로 된 천막으로서 임시 절을 만들어 주십시오. 대왕은 비단 천막을 신유림에 쳐 놓을 것을 명령하였다. 명랑법사는 사천왕상을 만들 시간의 여유가 없으므로 풀을 베어서 허수아비처럼 부처를 만들어 사방에 세우고 또 중앙에 하나 세워 5방불(五方佛)을 배치하였다. 신력을 지닌 큰스님 열두 분을 모시고 문두루의 법으로 불공을 올렸다. 문두루의 법은 오방 신장들의 힘을 도움 받는 불공이었다. 간절한 불경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른 새벽이 되니까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튿날 낮 바람은 자고 조용해 졌는데 서쪽에서 첩보가 들어왔다. 지난 새벽부터 서해에 큰 태풍이 일어 당나라 군함이 모두 침몰되고 파손되어 살아남은 것은 한 척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사천왕에 기도드린 덕으로 신라에서는 싸워보지도 않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문무왕은 대단히 기뻐하며 천막을 거두고 그곳에 화려하고 웅장한 절을 세우고 사천왕사라 했다.


이야기 2; 월명 스님은 경덕왕 때 사람으로 덕망이 높고 글 잘 짓기로 유명하였지만 피리 또한 잘 불었다. 스님께서는 사천왕사에 살았는데 달 밝은 밤이면 사천왕사 앞길로 피리를 불면서 다녔다. 피리소리가 낭산 기슭을 울려 퍼질 때 하늘의 달님도 걸음을 멈추어 월명 스님의 피리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서라벌 사람들은 스님이 피리를 불며 다니던 길을 월명리라 불렀다. 월명이란 스님의 이름도 본래의 이름이 아니고 달밤에 피리를 불면서 다니는 스님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760(경덕왕 19) 4월초 이튿날 해가 두 개 나란히 떠서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신라시대 하늘의 현상이 달라지는 것은 나라의 운수에 큰 영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경덕왕(재위 742~765)은 크게 걱정하였다. 왕은 첨성대(국보 31)에서 천문을 보는 일관을 불러 점을 쳐 보라 하였더니 일관은 인연 있는 스님을 모시고, 산화공양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산화공양이란 연꽃을 뿌리는 불공인데 연꽃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도 때를 타지 않는 맑은 꽃이다. 그 때문에 하늘에서 부처님이 내려오시면 연꽃 위에 앉으신다고 한다. 연꽃은 부처님이 앉으시는 꽃이라서 나쁜 악신들은 연꽃만 봐도 겁을 먹고 도망간다. 절에서 제를 지낼 때 연꽃잎을 뿌리는 것은 악신을 물리치고, 부처를 맞이하려는 뜻에서 하는 것이다. 이에 임금님께서는 반월성(사적 16) 조원전 앞에 단을 깨끗이 만들어 놓고, 인연 있는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 청양루에 행차하시어 기다렸다. 때마침 남쪽 밭 사잇길로 월명 스님이 지나가고 있었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서 스님을 불러왔다. 조원전 앞에 안내하여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 하셨다. 월명 스님은 임금님께 사양하여 아뢰기를 빈도는 화랑도로써 수양하고 있는 몸으로 향가는 알지마는 불경에는 익숙하지 못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은 불경이 아니라도 좋으니 향가로 지어 달라 하였다. 월명 스님은 그 자리에서 노래를 지어 바쳤다. 노래를 부르며 꽃잎을 날렸더니 조금 후에 괴변은 없어졌다. 임금은 월명 스님께 향기 좋은 차 한 봉과 수정으로 만든 백팔염주를 하사하였다. 이때 얼굴과 몸체가 아름답게 생긴 동자가 나타나서 월명 스님 대신에 차와 염을 받아 가지고, 대궐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가 버렸다. 월명 스님은 그 동자가 대궐에서 심부름하는 동자인 줄 알았고, 임금은 월명 스님이 데리고 온 동자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곧 그 동자가 대궐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월명 스님이 데리고 온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임금은 곧 사람을 시켜 동자의 뒤를 쫓게 하였다. 사자들은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동자는 대궐에서 예배하는 천주사 탑 속에 숨어 버렸고, 차와 염주는 법당 남쪽 벽에 그려놓은 미륵상 앞에 있더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임금과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임금은 월명 스님을 더욱 공경하여 명주 백 필을 더 하사하였다. 월명 스님은 또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향가를 지어 불렀다. 노래를 제단에서 불렀더니 문득 센바람이 불어 제상에 놓아두었던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아갔다. 바람은 종이돈을 날려 죽은 동생이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가는 노잣돈으로 삼게 한 것이라 한다. 월명 스님의 향가는 지성을 다해서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하늘을 감동시키는 것이라 하였다.

출처 : 불개 댕견
글쓴이 : 카페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