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새의 낙관(落款)/정도전
새의 낙관(落款)/정도전
새들에게 있어서 낙관이라는 습관은 오래된 풍습이었다 문신을 새긴 암벽마다 둥지가 되었고 뜨뜻한 아랫목이 되었으므로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부리를 비벼 족적을 남기는 일은 축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족적이란 새들의 풍향계였다가도 천적에게는 눈물일 수 있는 것 바닷가의 익룡 발자국 또한 그러했으리라
묵화 한 점 쳐 놓고 낙관을 해야 할 여백을 놓쳤다 자작나무 숲 물안개 사이로 새들이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루터기마다 태점(苔點)을 찍어놓은 듯 했다 부리는 날카로웠지만 발톱은 무뎠으니 새벽이 되도록 새들은 칠흑의 어둠을 방황해야 했다
돌아갈 곳 없는 묵화 속의 새들 강물에 먹물로나 풀어져 쪽배마냥 흘러가길 기다렸다 딱딱거리는 딱따구리는 한 칸짜리 초가집이 전부였으니 헛간이라도 한 곳 덧댔으면 좋으련만 이미 붓을 말끔히 빨아버린 뒤였다
한 무리의 새들이 화선지 밖으로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잠시 흐름을 멈춘 강물 위에 낙관을 찍었다
푸드덕, 새들이 도처에서 솟구쳐 올랐다
<당선소감>
새들이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풍경이 숨 쉬는 창을 활짝 열어 놓아야겠다
소호 앞바다 바람개비가 어지럽게 돌고 있다. 바다에 코를 박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바람 따윈 적수가 되지 못한다. 바람개비를 돌리는 힘은 파고에 비례한다고 했으나 속력의 계수를 재는 일은 내 몫이다. 그러나 숫자가 아닌 언어의 놀음만으로 바람개비의 회전수를 가늠한다는 것은 내겐 아무래도 무리수다. 바다에 부표로 구획 지어진 빈 칸들이 늘 아우성이다. 가끔 새들의 발장난마저 없다면 그대로 화석이 될 뻔 하다. 난 바다 풍경이 숨 쉬는 높이의 창에 살면서도 부표의 의미를 해독하지 못한다. 그냥 삶의 물음표 정도로 단정 짓는다. 잊어야겠다며 중얼거릴 때마다 부표를 따라 바람은 일어서고 새는 밤새 베란다 창을 두드린다. 창문을 닫아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새들을 달래는 일은 쉽지 않다. 온종일 눈이 답답하다. 근시에 노안의 징조까지 겹쳤다고 하니 시력(詩力)과 시력(視力)과의 상관계수는 유의미한 일일까 궁금하다.
풍경은 멀리서 볼수록 뚜렷해진다. 겨울밤, 추위에 꽁꽁 언 손을 녹여줄 수 있는 입김 같은 시를 쓰고 싶다. 따뜻할수록 혀끝의 미각이 오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선해 주신 명지대 정끝별 교수님, 시안을 맑게 해 주신 전남대 평생교육원 신교수님, 화요문우님들, 추운 날에는 매생이 국 같은 속 풀이용 시가 제격이라는 아내, 뮤지컬 작가를 꿈꾸는 혜수, 생태도시의 밑그림을 그려 보이겠다는 환수, 많은 격려와 박수를 보내줄 내 따뜻한 선후배, 동료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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