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10 전북일보

문근영 2015. 4. 21. 09:44

먼 지

             

                   - 김혜원

  

     1. 무게

     체중계를 꺼내려다

     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

     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

     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저 가뿐한 내공

     내가 눈금처럼 꼼꼼히

     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

     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

     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

     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

     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

     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

     문득 마음 무겁다

 

     2. 높이

     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

     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

     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

     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

     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

     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

     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

  

     3. 길

     차 안에 쌓이던 먼지

     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

     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

     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

     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

     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

     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

     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

     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

     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

     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

     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

     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

     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

     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심사평

 

  당선작 <먼지>는 한 주제를 가지고 세 편으로 나눈 일종의 연작시 형태를 취하고 있는바 신춘문예 응모작으로는 대단히 모험적인 기법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세 작품은 내적으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 속의 하찮은 <먼지>는 화자 자신, 나아가 우리 인간존재의 등가물로서 내밀한 삶과 그 가치를 성찰하고 긍정코자 한 시도로 이해된다. '1. 무게'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먼지'처럼 버리고 비우며 가뿐하게 사는 소박한 모습을 통해 가진 자들의 욕망에 대한 반성을 꾀하였고 '2. 높이' 역시 고단한 삶을 견뎌내게 하는 힘은, 바로 내일이라는 희망에 물꼬를 대고 있다. 특히 "먼지도 세월을 견디며 높이를 갖는구나"라는 아포리즘적인 시행이 두 심사자의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하였다. '3. 길'은 쌓였다가 깎였다가 하면서 오랜 시간 존재해온 '먼지'와 그들이 걸어온 '길'을 통해 무한한 시간 속에서의 부단한 자기 성찰을 드러내려 한 작품으로 속도감 있는 운율이 돋보인다.

  그리고 '방구석→차 안→허공→우주'로 확대되는 공간배치의 기법도 탁월하다. 자칫 관념으로 떨어지기 쉬운 소재를 끝내 작은 것들의 '견딤'의 미학으로 이끈 것은 오랜 동안의 습작의 뒷받침이 아닌가 싶다.

요즈음 시인은 많으나 시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시는 지천으로 흐드러지는데 정작 시인이 안보인다 라는 말을 뒤집어보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된다. 금번 최종심으로 넘어온 10명의 응모작들은 그 궁핍증을 덜어주는데 족히 일조가 될 만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노들강변으로 널려 있는 등단길을 외면한 채 연마에만 몰두해온데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므로 낙심은 금물, 응모자 제위의 행운을 빌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허소라(시인) 김용택(시인)>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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