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03년[매일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문근영 2015. 4. 14. 18:20
2003년[매일신문]신춘문예 시 당선작


낙타

김옥숙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당선소감
-울림이 깊은 詩 쓸터
빈 집 한 채가 있다. 뒤란에는 대나무 밭이 있다. 스스스 대숲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장독대 옆으로 말라 죽어가는 포도나무와 빗물이 고인 절구통이 놓여 있는 집, 허물어지는 담장 사이로 들쥐들이 드나드는 집, 마루에 먼지가 보 얗게 쌓이고 방안에는 눅눅한 시간이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집, 식구들이 떠나온 집. 그 집 처마 밑에는 아직도 제비가 날아와 알을 품을 것이다.
우리 식구들이 떠나온 그 집이 꿈속에 자주 떠오른다. 산 위에서 우리 집 앞마당 을 내려다보실 아버지, 많이 외로우시리라. 술을 그리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가시 고 없고 아버지의 무덤에 술 한잔 쳐드리고 싶다.
나의 시는 고향에 두고 온 빈 집이다. 가끔씩 그 집으로 들어가서 나는 마루를 닦 기도 하고 산을 바라보기도 하고 대숲을 지나는 바람 소리를 듣기도 한다. 내 마 음 속의 빈 집 한 채 결코 허물지 않으리라.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다. 가시밭길을 헤쳐오면서도 힘들다 한마디 하지 않은 나의 어머니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예리한 독 자가 되어주는 남편, 언니와 동생들,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늘 자극이 되어주던 노정완 작가, 글벗 선배님들, 반월문학 동인들, 경희사이버대 학 박주택 교수님, 나의 시를 수업시간에 읽어주셨던 신경림.이기철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 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울림이 깊은 시를 써서 보답하고 싶다.



심사평
-시적상상력, 서사적 밀도 뛰어나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철탑」, 「머물어가는 사람들」, 「옻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고서점에서」, 「결합」, 「매직아이」, 「곶감」, 「월전리」, 「어린골파」, 「낙타」, 「말이 그려진 방석」, 「지구촌 오지를 가다」, 「사월」, 「살꽃이 피다」, 「아리랑성냥」, 「홍인」, 「외딴묘지」, 「재봉틀」 등이었다.
모두들 그만그만한 수준을 지닌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이것이다라고 집어내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면서도 최후까지 남은 작품은 「살꽃이 피다」, 「사월」, 「말이 그려진 방석」, 「낙타」,「 어린 골파」, 「월전리」였다.
어린골파는 작품구성이나 서정적 처리가 가장 짜임새 있는 작품이었으나,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편차가 심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말이 그려진 방석」과 「살꽃이 피다」는 두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어법을 지닌 독특한 감수성의 소유자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것 이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부자연스런 연결이 마음에 걸려 고심끝에 제외시켰다. 「월전리」는 싱싱한 감각과 활달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낙타」와 함께 당선작으로 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한 작품을 선택해야하는 신춘문예의 응모방침에 따라 부득불 빠지게 된 아쉬움이 남는다. 시적상상력과 서사적 밀도가 더 뛰어났다는 점이 「낙타」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이유였다. 더욱 정진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권기호(시인, 경북대교수)
정호승(시인, 현대문학북스대표)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엘시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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