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제3회 《질마재문학상》당선작 - 애초의 당신 외 2편/김요일

문근영 2014. 11. 28. 07:56

<1>-애초의 당신/김요일-

 

 

태초의 이전부터 오신다더니

꽃과 바람

물과 불

하늘과 땅 어디에도 보이시지 않네

 

터진 듯 쏟아 내리는 별빛 속에도 묻어오지 않으시고

전생의 전생에도 보이지 않으시는

 

우주의 바깥에 계신 당신

 

모든 이즘ism의 프리즘인

처음의 줄기이자 분열의 마지막인

 

아, 당신은

 

<2>-Love Song/김요일-

 

 

야무나Yamuna 새벽 강에 옷 내어놓고

눈먼 하늘 반짝이는 알몸 바라보네

 

그렁그렁 별빛은 더 찬란하고

꽃등불 파는 소녀 아직 강가에 나오지 않았는데

 

나는 크리슈나, 당신은 라데

소의 꼬리가 소를 흔들며 오르차Orchha 언덕 넘어가네

 

<3>-카치올리의 음악가-詩人을 위한 카덴차/김요일-

 

 

   K는 국경 너머 카치올리라는 작은 마을 서북쪽에 위치한 숲의 가장 높은 나무 위에 살고 있었다. K는 자신의 분비물로

빚어 만든 ‘급진고물소(急進古物所)’라는 고치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보았을 땐 커다란 호박벌집처럼 보였으므로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기거하는 방이 누에의 것과 다른 점이라면 고치의 상단에 안팎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문의 역할을 하는 장치가 달려 있고 안에서 밖을 조망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창을 달았다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먼저 해 뜨는 숲을 내려 보고 해 지는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아름다움에 대해서 노래할 처

지만은 아니었다. 태양의 위편에 살고 있다는 神이라는 자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뿌연 햇살과 매캐한 새벽 공기를 뿌려

대기 일쑤였고 하루 이틀 사흘 고치 안에서 빈둥거리던 K도 잊히지 않을 생을 살아가야겠다는 결심에 카치올리 마을의

서쪽에 있는 음표 만드는 공장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명맥이 끊긴 지 오래인 버려진 음표 공장에서 K가 했

던 일은 음악가들이 만들다 실패한 음악의 부서진 껍질이나 낡고 시들어버린 음표들을 모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은 다

음 음악가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거리의 가로수며 술집 구석의 먼지로 혹은 도서관 창가 책상 모서리의 햇살로 달아 놓는

일이었다. 그러면 음악가들은 산책을 하거나 술을 마시다가 K가 몰래 달아 놓은 음표에게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내었다.

 

   처음 K가 음표 공장의 문을 열었을 때 카치올리에 사는 그의 술꾼 친구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로라하

는 음악가들, 도도한 숲속의 배꼽 없는 요정들마저 깜짝 놀랐다. 그의 솜씨가 천부적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뿌려 놓은 음

표들은 매일 새벽 거리에서 은종으로 울려 퍼졌고, 밥 짓는 저녁이면 푸른 연기로 자욱하게 마을을 뒤덮었다. K로 인해

카치올리는 시보다 사랑스러운 곳으로 넘쳐나기 시작했고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책 밖으로 난 새 길을

따라 산책하기도 했다. 놀다 지쳐 심심해진 소녀들은 가지 끝에 발그레한 열매로 매달리기도 하고 눈꽃이 되어 날아다녔

다. 졸리진 않았겠지만 잠이 들면 마을 사람들은 백 가지의 꿈을 꾸곤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유일한 마을의 음표 가공 수리사인 K가 ‘급진고물소’에 가는 것도 잊은 채 몇 십 년 동안 공장 구석

에서 먹고 자며 더러운 음표를 열심히 닦아 마을 이곳저곳에 장치를 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그를 잊어가기 시작

했다. 음악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음악을 만들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별보다 반짝이는

마을 도처의 음표들도 당연히 존재하던 것으로 여겼다. K를 칭송하던 사람들도 그를 지나치면서 모른 체하거나 ‘어이, 잘

지내지. 언제 한 잔 하지?’ 따위의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마을은 여전히 아름다워 보였고 사람들도 언제나처럼 즐거워 보였다. 공연장은 마치 새로운 것 같은 옛날 노래를 들으

며 술 마시고 춤추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노인이 된 구부정한 K는 공연장에 버려진 오래되고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음표들

을 빗자루로 쓸어 담으며 뚝뚝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의 눈물을 봐 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사람도 없

었다. 그는 미소를 잃어 갔고 말문이 막혀 갔다. 봉인된 침묵은 사실도 존재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K는, 카치올리의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는 음악가인지 몰라’라는 생각을 g하기도 했고, 마을의 노예는 아니었

지만 ‘내가 노옌가?’라는 의문을 불쑥불쑥 떠올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마른 잎을 말아 담배

태우며 쿨룩쿨룩 억지 기침을 했다. ‘쿨룩쿨룩, 이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야’라고 K는 중얼거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정말

아니지’ 라며 고개를 저었다. 바꿀 수 없다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 번의 망설임 끝에, 공장을 떠난 K는 다시 그의 고치 ‘급진고물소’로 돌아왔다. 고치 속 작은 방에 누워 K는 불편하지

만 가장 편할 긴 잠을 청하기로 했다. 갑자기 그는 수십 년 동안 잊고 지낸 빈둥거리던 본연의 K가 그리워졌다.

 

   ‘그 좁은 방 안에서 불편하게 구부리고 누워 주머니 속에 넣어져 있던 몇 개의 음표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K는 가장 좋

아했지.

 

   그 좁은 방 안에서 불편하게 구부리고 누워 오랜 노래 부르는 것을, K는 가장 좋아했지.

 

   불멸을, 신화를, 혁명을, 꿈을, 말하지 않고 만지지도 않고, 먼지보다 더 작은 알갱이로 둥둥 띄워놓고

 

   그 좁은 방 안에서 불편하게 구부리고 누워 그것들을 천천히 들이마시는 것을, K는 가장 좋아했지.’

 

   K는 고치의 문을 닫고 수십만 가닥의 붉은 핏줄로 문틈을 꿰매기 시작했다. 작은 창으로 스며든 핏빛 햇살은 이상하리

만치 그를 평안하게 감싸 주었다.

 

 

<<김요일 시인 약력>>

 

*1965년 서울 출생.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장시 『붉은 기호등』,

*시집 『애초의 당신』.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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