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고 싶은 시

[스크랩]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역을 놓치다 / 이해원

문근영 2014. 11. 1. 10:27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을 놓치다 /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
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
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
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
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
내 선잠 속으로
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
안 잤나
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당선소감

 

 

지친 나에게 새로운 불꽃이 일어

이런 기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두 번의 수술로 몸과 마음이 지쳐 올해가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귀를 의심했습니다.

너무 떨려서 전화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습니다. 늦게 시작한 분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젊은 문학도의 길을 가로막은 건 아닌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게 출발해 시의 발아점까지 달리기엔 숨이 찼습니다. 햇빛도 보기 전에 멈춰버린 날들이 폐지처럼 수북이 쌓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시를 놓고 있다가 느닷없는 당선 소식으로 마음에 불꽃이 일었습니다. 이 소중한 불꽃, 시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태우겠습니다.

옛날 호롱불 밑에서 밤늦도록 책을 보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가슴에 시의 씨앗 하나 묻어놓으신 분들, 기뻐하실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보고 싶어 눈물이 납니다.

주저앉은 제 손을 잡아주신 유종호, 신경림 심사위원님과 세계일보사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길로 이끌어 주신 박주택 선생님, 항상 용기를 주시던 이문재 선생님께 큰절 올립니다.

힘들 때 힘이 되어 주시던 마경덕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시사랑 화요팀 선생님들과 문우들 고맙습니다

.

묵묵히 지켜보는 남편과 딸 미라, 아들 명훈이와 창훈이, 친지들, 친구들, 저를 아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본명 이숙자
▲1948년 경북 봉화 출생
▲1999년 ‘수필춘추’ 신인상 수상

 

 

 

 

심사평

 

 

유종호(문학평론가) 신경림(시인)

애달픈 시… 서민가정의 풍경 잘 묘사


지난해보다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창작교실 등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특히 정수박이, 설수인, 이해원의 작품들은 당선작으로 일단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정수박이의 ‘능선을 바라보며’는 무리 없이 읽히는 장점을 지녔으며 호소력도 상당하다. 한데 내용이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한 번 들은 것같이 귀에 익다. ‘민달팽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데기조차 지니지 못하고 대학을 나온 아들의 취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아버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는 무언가 1퍼센트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느 한 구석 맺힌 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설수인의 시 가운데서는 ‘투석실의 하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 우선 호소력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고통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데 조금 장황하고, 내용 탓인지 읽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없지 않다. ‘줄 끊긴 바이올린’이나 ‘앉은뱅이 저울’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원의 ‘역을 놓치다’는 참 따듯하고 애달픈 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 ‘육교 밑 고고학자’나 ‘냉장고는 태교중’은 비유가 안이하고 서툴다. 이상의 후보작들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기로 하면서 ‘역을 놓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40년차 새내기 동기’의 희망 메시지


모녀 아닌 동기 사이 2012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과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이해원(오른쪽)·박송아씨. 40년 나이 차이가 나지만 이들은 막 문인의 길을 시작한 동기 사이다. 남제현 기자

64세 이해원씨 50대에 시작한 시 공부…최고 늦깎이 당선 이뤄내
24세 박송아씨 왕따 당했던 초등생 시절 문학 소설 읽으며 극복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만 보면 이들은 어머니와 막내딸쯤 돼 보이는 모녀 사이 같다. 무려 40년이나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의 나이를 확인하고 나면 더욱 그러한 확신이 생길 법하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임진년 첫날 나란히 세계일보 신춘문예 관문을 막 통과한 새내기 동기들이다. 올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자로는 가장 젊은 박송아(24)씨와 신춘문예 시 부문에서 올해뿐 아니라 신춘문예가 시작된 이래 가장 고령일 법한 이해원(64)씨가 그 주인공이다. 본격적인 실버시대에 접어든 이 즈음, 육십부터 청춘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나이가 많으면 최종심에 올라도 떨어뜨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젊은이들도 많은데 뽑아주셔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문학이 있어서 삶을 견딜 수 있었는데 이렇게 큰 기쁨까지 안겨주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해원씨는 경북 봉화에서 1남7녀의 딸부잣집 여섯째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 동시를 잘 써서 곧잘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고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대구의 직물회사에 다니며 막내 동생을 공부시켰다. 1974년 결혼해 큰딸과 두 아들을 낳아 길렀다. 출판사나 신문사 등에서 주최하는 글쓰기 대회에 출전한 아이들이 그의 지도로 상을 받기도 했다.

이씨가 시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세 아이를 키우고 50대로 내달리던 1998년.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서울시민대학 강서분교’의 수필반을 다니면서부터다. 시민대학 강서분교가 없어지자 을지로 본교를 찾아가 시 강의를 들었고, 2005년엔 중앙일보 신춘문예 본선까지 올랐지만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몸이 좋지 않아 지난해에는 두 차례에 걸쳐 수술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씨는 ‘나이 든 사람을 뽑지 않는다’는 ‘현실보다 무서운 소문’에 꺾이지 않고, 만 64세에 드디어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선작 ‘역을 놓치다’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삶의 곡절을 깊이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현학으로 포장하지 않은 일상의 언어로 이처럼 따뜻하게 쓸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상찬을 들었다. 이씨는 당선 소감에서 “무뎌가는 마음으로 발화점을 향해 자신을 밀어붙이기엔 숨이 찼다”며 “점화도 되기 전에 멈춰버린 날들이 폐지처럼 수북이 쌓였다”고 지난날을 회고했다.

“선생님 눈에 들고 싶었는데, 그게 다른 아이들 눈에 거슬렸나 봐요. 오랫동안 따돌림을 당했죠. 초등학교 3학년 때가 제일 심했던 것 같아요. 저는 소심하고 내성적이 돼 버렸고요. 따돌림을 당해 혼자 있게 됐지만 책이 위로가 됐어요.”

이씨와 달리 24세(용띠)의 젊은 나이에 세계일보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박송아씨는 초등학교 때 오랫동안 따돌림을 당했지만 책을 통해 위로받고 문학을 통해 구원받은 경우다. 박씨는 광주시청에서 근무하는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의 1남1녀 중 장녀로 자랐다. 그는 고교 1학년 때 윤대녕의 작품을 읽으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고교 3학년 때부터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산문은 소설의 길을 열어주었고, 소설은 동덕여대 국문과를 거쳐 지난해 고려대 문예창작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한 그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주었다.

박씨의 당선작 ‘신 귀토지설’을 읽고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서영은씨는 “‘여자 성석제’가 나왔다”고 경탄하면서 남미의 노벨상 수상 작가 마르케스가 연상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박송아씨는 “제 성격은 내성적이지만 문학에서는 즐겁게 쓰고 싶다”면서 “웃음 속에는 슬픔도 분노도 함께 녹아 있다”고 덧붙였다.

김용출 기자

 

출처 : 작가 사상
글쓴이 : 황봉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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