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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 어린 서발턴의 시적인 목소리

문근영 2014. 5. 14. 14:32

어린 서발턴의 시적인 목소리
[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나민애
□ 어린 서발턴의 시적인 목소리
 
pm 4:00. 이모들은 단추들을 매달며, 집으로 가렴. 신발도 없이 걸음마를 시작하기 전에. 길어져요. 스웨터의 여왕처럼우리는 쉬지 않고 돌아가는 회전목마. 여왕의 호화로운 스웨터에 매달려 징징대죠. 우아하게 뜯어져 가는 오후처럼
 
PM 5:00. 집으로 가요. 어제만큼 늘어난 이모의 목이 부패하기 시작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모는 집으로 가요. 방바닥을 굴러가는 아가들과 기어가는 단추들을 두고 열한 개는 삼키기엔 너무 많은 이름이죠. 나도 고백할게요. 엄마도 없이 지나간 십일 개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요. 매일 밤, 이모도 가슴으로 떨어지는 실밥들을 양손으로 다 잡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am 8:00. 엘리베이터가 울리면 이모가 와요. 서로의 눈 속에 담긴 기다란 실밥들을 열한 개의 속눈썹으로 간질이며, 안녕. 적응이란 그런 거야. 축축한 잠을 자고도 다음날 말짱한 얼굴로 안녕, 하는 것
 
오후가 될 때까지 이모들은 스웨터의 여왕처럼 길어져요
 
- 조혜은, 「스웨터의 여왕」 부분, 《유심》 2010년 9/10월호
 
 
* 여기 개성적인 목소리를 지닌 시인을 소개한다. 조혜은 시인은 2008년에 등단한 신인이다. 시 편수가 많은 것은 아니고 아직 개인 시집을 발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젊은 시인은 확실한 자기만의 개성적 주제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예상하건대 미래의 첫 시집은 사회의 소외층에 대한 시적 형상화로 묶이게 될 것이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은 실천적 문학관을 가진 많은 시인들의 시적 주제로 다양화된 바 있다. 그 중에서 조혜은 시인을 주목하고 싶은 이유는 그의 시선이 특히 어린 아이들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전에 발표한 「밀폐용기 속의 아이들」이나「다이빙」과 같은 시들 역시 보호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아마도 이 시인은 태생적으로 아이를 좋아하고 연약함을 보듬어 주고 싶어하는 보호본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호본능을 가진 모두가 그 대상을 시적 대상으로 선택하거나 이 시인처럼 지속적으로 잘 형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생명은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고, 권리를 주장하지도 않으며,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순진무구한 서발턴이다. 위급 시에 가장 먼저 보호되어야 하지만 기아와 전쟁으로 가장 많이 희생되는 연약함의 상징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에도 상징적 기아와 전쟁으로  인해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어린 생명들이 존재한다. 조혜은 시인의 팔은 아마도 소외된 어린 생명의 구체적인 온기와 냄새를 기억하는 듯하다. 영아보호시설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시 「스웨터의 여왕」에는 시간별로 자원봉사자 이모들의 추이를 이모와 아가의 시선을 섞어가며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은 이모들의 스웨터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리고 모든 아이의 엄마가 되어 줄 수 없는 이모들은 늘어난 스웨터의 목둘레만큼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이모들은 더 아파야 하지 않을까, 아픈 이모들이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조혜은의 작품이다.
 
□ 하늘의 물과 땅의 달
 
세 살 나이로 우물에 빠진 달을 건지다 죽은
점방 춘님이의 어린울음 서 말,
전신 비틀어 눈동자까지 중심에 세운 뒤라야
한 발짝 겨우 떼어 놓던 당숙 아저씨 절룩임 아흔 단,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동냥하던
아홉 살 준식이의 설움 삼만 필을 내 앞에 부려놓고
춘천호에 몸을 담근 너의 수면이 부르르 떨린다
 
호숫가, 방아깨비 절뚝이며 외발로 뛰고
쑥국새 오래도록 감나무에 훌쩍임을 매단다
춘님이는 우물에 빠지던 그날처럼 아직도 몸을 수그린 채
물에 빠진 달을 움키어 자꾸만 뜯어 먹는다
 
주섬주섬 부려놨던 것들을 챙기던 너의 혼잣말이
중얼중얼 빛으로 부서져 내린다
자신의 얼룩은 춘님이의 눈물 콧물이라고,
당숙 아저씨와 점순이의 피눈물자국이라고
 
- 서주영, 「달」 전문, 《유심》 2010년 9/10월호
 
 
* 달 하나를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은 참 어렵다. 이것은 어느 시인이든 인정하는 사실일 것이다. 그만큼 달의 신화적, 상징적, 문학 전통적인 의미는 강하다. 여성, 태모신, 탄생과 죽음, 부활, 비애, 광기 등 달에 따라오는 수식어만 해도 수십이다. 이렇게 다루기 위험한 달이라는 소재는 자칫하면 시를 상투적인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만다.

다행히 서주영 시인은 이 작품에서 달의 위험한 매력을 피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시인이 하늘에 뜬 달이 아니라 "물에 빠진 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물의 상징이 하얀 달이라면 반대로 지상에 내려앉은 달의 상징은 고여 있는 연못이나 호수와 같은 원형의 물이다. 다시 말해서 지상의 달인 물과 하늘의 물인 달이 서로 연결되면서 그 사이에 눈물이나 서러움을 넣을만한 새로운 공간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시에서 춘천호의 수면이 떨리면 그 수면에 비친, 하늘의 달이 아닌 새로운 달 또한 떨리게 된다. 오래간만에 하늘의 물과 땅의 달에 대한 시를 보았다.

□ 10월에 읽는 기다림의 편지
 
열어 둔다
 
바닥에 빗자루를 댄다
오늘 아침은 빗자루가 타일 바닥을
쓸지 않고
쓰다듬고 있다
 
네가 오면 제일 먼저
 
누가 오기로 한 날이 아닌 날에도
매일 아침 현관문 앞에 알록달록
꼴람을 그려 놓던
인도 사람 얘기를 해 줘야지
 
무성하게 자란 벤쿠버 고사리를 문밖에 내둔다
네가 오기로 한 날이니까
 
열어 둔다
시간이 조금씩 주름이 접힌다
시간이 조금씩 허점을 다듬는다
 
밤새
평생 동안 잃어버리기만 했던 우산들이 모두 돌아와
수북이 쌓여 있다
평생 동안 젖어 있기만 했던 우산들을
나는 하나하나 편다
그대로 둔다
 
네가 오면 제일 먼저
 
이것들을 보겠지
우리 집을
칠월의 포도송이 같다고 해 주면 좋겠다
아니면 팔월의 오동나무
 
열어 둔다
 
- 김소연, 「현관문」, 《세계의 문학》 2010년 가을호
 
 
* 김소연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언제나 세심함을 느끼게 된다. 세심함이 사소함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보다 우아한 섬세함이다. 소설 쪽에서는 거대서사가 끝나고 여성 작가들의 약진을 주목하던 시기에 그들의 아주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호평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이제 시간은 흘러 그런 잔잔한 마음의 파문이 이제 새로울 것도 없지만 화룡정점처럼 좋은 마무리는 역시 사소한 디테일이 아닐까 한다.

이 시에서 나는 너를 아주 간절하게 기다린다는 심정의 토로는 한 구절도 없다. 그래서 좋다. 대신 다른 것으로 표현한다. 하나는 "열어 둔다", 둘은 "고사리", 셋은 "우산"이지만 정작 마음에 들었던 표현은 빗자루에 대한 것이다. "오늘 아침은 빗자루가 타일 바닥을/ 쓸지 않고/ 쓰다듬고 있다"니, 얼마나 사랑스럽고 시인답게 섬세한지. 이런 달콤함이라면 기다림도 영 나쁘지만은 않다.
 
 
□ 사랑하는 당신에게
 
오늘
맑은 날, 아주 끝없이 맑은 날 잠에서 깨어나
더 이상 상냥하지 않는 나의 얼굴을 창틀 위에 올려놓고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는 풍경이, 비극적으로 보일수도 있구나 싶은데
늙은 엄마는 마루에 앉아 나보다 더 비극적으로
끼리끼리 살아야 한다고, 꼭꼭 숨어서 우리 아닌 놈들은
우리 사이에 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그래야 네가 악몽 속에서 깨어날 수 있다고, 운다
 
어제
늙은 엄마가 나한테 꽃을 주면서 웃었다
기어이 나를 울리는구나
미안하다 말하곤
우리 둘이 붉은 꽃잎을 한 점 한 점 따먹었다
 
이틀 전
병원에 갔었는데
나보다 키가 살짝 큰 의사는 나를 보고 죽는다고 말했다
신발을 신지 않은
나는 죽을 수도 있겠다 싶다
앳된 간호사가 짧은 스커트를 팔랑거리며 문을 열고 나간다
그 안이 궁금한 건 밖이 이미 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날들의 안과 밖이 열리고 닫힌다
집으로 돌아와
창틀에 피를 토하곤 울었다
늙은 엄마는 절름발이 새처럼 그 피를 부리로 찍어
허공에 문질렀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내일
내일은 어제에서 만나기로 하자
두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들고
끝없이 맑은 하늘을 목까지 당겨 입고
엄마가 준 용돈으로
엄마를 그리워하게 될 선물을 사자
 
그리고
꼭꼭 숨어서, 숨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그렇게 다시 태어나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어느 날엔가 누가 나를 찾으면 꼭꼭 숨어서
그 동안 아껴뒀던 눈물이랑, 젖은 웃음이랑 다 보여주고
다시, 어딘가로 꼭꼭 숨어서
세상에 없는 얼굴로 다시, 태어나
아이가 되고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나는 나의 늙은 엄마를 떠올리며
창틀 위 화분처럼 저녁 쪽으로 누워 말할 것이다
이젠 괜찮아요, 엄마
 
- 최치언, 「괜찮아요, 엄마」, 《현대시》 2010년 9월호
 
 
* 어머니에게 자식이란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한다면 부족하다. 연애에서 지칭하는 사랑이라는 것과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하고는 많이 다르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따로 표현할 더 좋은 말이 없어서 편의상 사용하는 부분적 표현일 뿐이다. 대부분의 어머니에게 자식은 사랑스럽기보다는 절대적인 존재다. 자식이 없어지나 상하면 어머니의 세계 자체가 위협을 당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한계 없이 소중한 존재가 바로 자식이다. 
그러면 자식에게 어머니의 이런 마음은 어떨까. 때로는 슬픔, 때로는 부담감, 때로는 연민,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역시 어머니와의 질긴 유대감으로 표현되지 않을까. 언젠가 헤어질 존재이면서도 김초혜 시인의 「어머니․1」의 시구처럼 한 몸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이별하기가 고통스럽다. 여기서 최치언 시인의 화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선고받은 육신이나 정신이다. 그리고 자신의 비극적 상황을 사회적인 문제나 자아의 문제로 치환하기 전에 어머니와의 관계 안에서 고민한다. 아마 이 화자는 어머니를 많이 사랑해서 쉽게 좌절할 수도 없는 착한 자식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시구가 가슴을 울린다. 이 시는 "이젠 괜찮아요, 엄마"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저런, 나보다 당신이 더 걱정인 이런 절망이라니.
 
 
□ 물 속의 죽음과 그로테스크
 
나의 숲은 어디로 갔나
시끄러운 건반을 품고 늙어가는 숲은
비밀을 적어놓은 색색의 수첩종이처럼 떨어지는
  이파리,
      이파리들은
 
새는 어느 숲에서 날아오르나
어두워진 부리는 더 어두워지나
목이 긴 여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가장 긴 노래처럼
 
어느 강 하류에서 심장은 썩어 뭉개지나
두 눈은 무너진 망루 잿더미 밑 지금도 까맣게 빛나나
코는 타는 살 냄새에 미쳐 아직 거기 갈고리처럼 걸려 있나
 
   어깨뼈를 부서뜨리며 견장처럼 매달린 나의 옛집과
   꿈의 문지방을 넘어서야 비로소 다정해지는 연인의 얼굴
   실패한 첫 걸음과 조금도 나아지지 않은 마지막 걸음의
   검푸른 강물,
바닥 거기 내 두 발은 묶여 있는데
내 두 손은 그렇게 떠오르나
폐허에 앉아 눈보라 맞으며 조그맣게 신을 부르는 사람처럼
아직 오지 않는 고통을 다 겪었다는 듯 먼저 부서져버린 책상처럼
 
초록으로 반짝이는 햇살의 시간과
정물화 속 사과 채 마르지 않은 붉은 물감의 시간을 지나
 
문득 내 앞에 와 저무는 세계 위로
라이비스 가지 위 혼자 남겨진 떼까마귀의 검은 깃털 떨어진다
 
밤의 물주머니는 또 누구의 지붕 위에 엎질러져
죽음의 흰 눈동자를 던져놓나
 
영원한 흰 빛 혹은 검은 빛으로 완성되는 물결,
그 위를 떠돌며 흠뻑 젖기를 두려워하는 종이로서
나는 어떻게 희미해지나
네 번의 꿈과 네 개의 길
시작되는 눈꺼풀 아래 고요한 그곳,
온몸 비늘 다 벗겨진 그림자와 함께
너는 어떻게 죽어가나
 
- 김경인, 「물 위에서 노래함」 전문, 《현대시》 2010년 9월호
 
 
* 이 시는 '숲'과 '이파리'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조용하고 잔잔한 산림의 시학이 전개될 것이라 예상하고 읽는다. 하지만, 3연에서부터 이 시의 반전이 시작된다. 이 시는 천연피톤치드와 삼림욕을 목표로 하는 시가 아니었다. 상황은 반대다. 「물 위에서 노래함」 은 검푸른 강물의 저 밑바닥에서 부패 진행 중의 한 여인이 부르는, '나는 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가'에 대한 잔혹한 노래의 일부이다. 그래서 시를 따라가다 보면 원혼의 산-죽음이 물을 뚝뚝 흘리며 헤매고 다니는 그런 그로테스크함을 엿보게 된다. 그런데 그 어조가 강렬하지 않고 잔잔해서 이것을 조용한 무서움이었다가 적막한 슬픔이 되었다가 다시 무섭고 슬픈 시가 되고 있다.

  이 시에서 물에서 죽은 자는 물을 떠날 수가 없다. 죽은 자가 떠나지 못하는 물이란 죽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이것만큼의 비극은 없을 것이다. 시인은 이 비극을 이야기하면서 「물 위에서 노래함」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죽은 자의 육신은 물 속에서 부패되어 가고 있으나 그 영혼은 물 위에서 그 죽어가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로도 읽히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쉽게 종결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 물 속은 시인의 방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현실일 수도 있고, 과거에 사로잡힌 현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물이 실제로 무엇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원혼의 상태이다. 그리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자신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그 참담함에 있다. 
 
 
평론가 나민애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문화저널21 문화편집팀 munhak@mhj21.com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우가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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