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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의 창을 열며 - 변압기(전건호) 서평 / 김선주평론가

문근영 2014. 4. 1. 14:13

 

세계의 창을 열며

김선주 / 시인, 평론가

 

 

 

 

1.

시인의 눈은 어디에서 세계를 조망하고 있는 것일까. 있을 법 하면서도 없을 것 같은 세상사의 소소한 이유들에 대하여 소통의 문을 여는 게 ‘시’ 작업이다. 시인은 문명의 속성과 변형과 왜곡을 찾아가므로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다. 새롭고 낯선 풍경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시인은 현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글쓰기의 시작은 시인이며 제일 먼저 자신이 쓴 글의 주인이 되어 읽어야 한다. 밤새껏 영혼을 애태우며 쓴 글이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고 백지가 되어 날아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단 한 줄의 시도, 소설도, 수필도 독자를 감응케 하는 일이 많지는 않다. ‘글’이 ‘시’가 복잡하고 빠르게 변모되는 세계에 과연 필요 가치가 있기는 할까. 이는 모든 시인들의 숙제이다.

 

 

‘시’가 ‘글’이 쓸 때마다 불후의 명작이 된다면…

‘글’이 밥을 먹여주는 것 보다 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면…

 

 

비결은 어디에서 시인들을 기다리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의외로 간단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시적 언술의 대상이 되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그 비결일 것이다. 대상은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먼저 느껴야 한다. 감성으로 풀어내는 ‘시’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으로부터의 탈출이고, 인격의 표현이 아니라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라고 엘리엇은 말했다.

 

 

잠재적 욕망과 의식에 불을 당기되 변화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응축된 힘을 발휘하여 ‘시’ 그 절정의 세계를 관류해야 하는 게 시인의 의무이다. ‘시’의 눈뜸은 단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전언이며 메시지다. 시인은 문명의 비극적인 굴레와 허망에 ‘사랑’으로 점화를 하는 사람들이다. 어디에서 발화해야 하는 것인지는 시인 자신만이 가지는 고유의 영역이다.

 

 

타고, 튕기고, 치고, 뜯고 서로 얽혀 소리를 내는 것은 시적 표현의 중요한 본질이 되기도 한다. 자연대상이 지닌 이미지를 통한 ‘생생함’, ‘자유로움’, ‘상상력’ 등은 세계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감각과 관련성이 있다. 외적으로 드러난 존재와 대상에 대한 의미는 시인의 ‘자유로운 희롱’이며 그 속에서 움직이는 시의 개념은 감각을 현상화 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2. 전건호의 <변압기>

 

 

<변압기> 참으로 생소한 제목의 시집이다. 변압기란 교류 전기회로에서 전압을 증가 또는 감소시켜 다른 교류로 전기회로에 전기 에너지를 전달하는 기구라고 한다. 시인 전건호는 전자기유도를 이용하여 전압을 변화시키듯 생경한 문학 집단에서 환상과 환상의 움직임으로 시적대상에 대한 굴절과 변혁을 꾀하고 있다. 자신에게 내재된 지평을 더욱 다양하고 해체적인 이미지들로 대치시키며 그 해체의 원리 속에서 시의 정체성을 찾아가려 한다.

 

 

전건호의 시 ‘검침원’은 현대사회의 기존 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는 상황을 예리한 시각으로 풀어낸다.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정체성, 그 방황은 시인의 시각에서는 존재를 구속하는 공허한 외침으로 들리기도 한다. ‘검침’과 ‘계량기’ 그 속에 온전히 다 ‘기록’되어지는 ‘생의 고비’, ‘심장박동’, ‘역주행’, ‘과부하’가 어리석은 인간들의 열망과 겹쳐져 으슬으슬 소름이 돋게 하고 있다.

 

‘검침원’이 제시하고 있는 열린 공간은 현대인이 추구하는 현상유지와 안정이라는 축에서 심각한 대립구도의 이미지를 낳게 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구원성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시인의 의도는 시대의 거울인 예술성에서 구체적 전망과 증언을 하고 있다. 시의 구원성은 낯설음에서부터 출발하지만 ‘검침원’의 시적 트라우마는 시인의 세계관과 윤리와 도덕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전건호가 이야기하고자 한 시적 체험공간은 세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대문 좀 열어주세요

당신을 검침하러 왔거든요

얼마나 피 뜨거운지

 

-중략-

 

 

계량기엔 다 기록되어 있어요

생의 고비마다 쿵쿵 뛰던 심장박동

무모하게 역주행한 흔적도 점검합니다

과부하 걸린 생애까지 다 검침해 청구할 겁니다

-검침원 -중에서

 

그의 시는 내적 탐색과 인식의 대변으로 분리되어진다. 시인에게 집요하게 붙어 있는 과거회상의 이야기는 실존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관념적인 시어에서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 존재의 비밀 부호는 확실하게 드러난다. 시의 진폭은 긴장의 밀도와 치열한 실험 정신에서 나타난다.

전건호 시의 특징은 현대시가 필요로 하는 이념과 낡은 가치관을 깨뜨려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는데 있다.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대립은 체험과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의미로 교묘히 위장 시키고 있지만 좀 더 살펴보면 의미와 의미의 중층 구조로 겹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그가 드러내고자 한 세계의 모습은 세계와 시적 대상물에 대한 관조적 태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시인의 무의식적 편애의 대상은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으로 구분이 된다. ‘인상’ 지울 수 없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은 객관적인 실체에 의해서 창조적 실체로 독자를 불러들이고 있다.

 

 

근무복 바뀌면서 남은 견본 몇 벌, 견본품이란 빨간 글씨가 마음에 걸렸지만 들일 할 때 입으면 좋을 듯해 고향에 보내드렸다. 명절에 내려가니 견본품 글자가 새겨진 근무복을 입고 아버지가 마당을 쓸고 계셨다.

 

 

“아버지 그 옷 입지 마세요.”

“왜 이 옷이 어때 그러냐. 나 편하면 그만이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껄껄 웃는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가 혀를 차셨다.

“니 아부지 낯 두꺼운 걸 누가 말리냐. 밤낮 저 옷만 걸치고 다니신다. 글씨!”

용돈 한 번 제대로 못 보내드리다 달랑 견본 몇 벌 보내드렸더니 아들 회사 다니는 거 자랑할 요량인지 남들 놀리거나 말거나 견본품만 입고 다니신다는 것이었다.

“동네 영감탱이들이 ‘야, 이놈아 옷이 견본이냐? 니가 견본이냐? 며 씨부렁거리며 놀려쌌는데도 한사코 저렇게 입고 다니신다.”

못난 자식 덕에 견본이 된 아버지 졸지에 유명인사 돼버렸다.

-견본품 전문-

 

 

의식과 무의식의 합일 속에서 전건호는 자기 원형을 만나고 있다. ‘견본품’ 은 시인의 상징적인 세계관이며 상징적 이해로 분류되어진다. 자기원형의 초월은 대상적 이해(intellektuelles, gegenstandliches Verstehen)로 아버지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치유를 가능케 한다. 아버지는 ‘자기’의 개념으로 ‘견본품’을 보고 있다. 그것은 정신의 전체성을 이루는 보상기능과 ‘절대’로 ‘의식’의 ‘특성’이 되고 있다. 이는 ‘아버지’의 ‘자아’ 이자 전건호의 ‘자아’이다. 이처럼 무분별성의 ‘자기원형’은 진정한 의미의 현실을 드러내며 인간정신의 전체성이자 인간의 본질인 것이다.

 

‘견본품’이란 반영 은유로 일상의 체험에 잠들어 있는 감각을 깨우고 있다.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시인의 일상적 체험 공간은 시인의 상흔과 함께 만나고 있다. 현대시의 시적 스토리는 과거-현재-미래의 순환적 교감의 잘 짜여 진 세계이다. 시의 구성은 이렇듯 전경과 후경 제시와 전망 그리고 어휘들의 충격을 통해서 새로운 부활을 꾀하고 있다.

 

 

주렁주렁 매달린 식구들 부양하다/몸살을 앓던 여자가/끝내 쓰러졌다//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아파트며 공장이 순식간에 절망에 휩싸였다/파르르 떨던 가로등도 목을 꺾었다

 

 

-중략-

 

누가 저 지경이 되게 방치했냐고/서로를 탓하며 분개했다//오늘도 상처 난 몸으로/허공에 매달려 신음하는데/쳐다보는 사람 하나 없다

 

-변압기-중에서

 

 

‘퍼스나’ 즉 ‘의미의 탈바꿈’을 시도한 시인은 ‘자아’의 투사물을 통하여 부정적인 현실의 문제성을 짚어내고 있다. 정서적 착시 현상은 자기희생이 있어야 가능하며 그것은 시인의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여져 있는 간극이다. ‘변압기’는 그 자신이며 부끄러운 ‘자아’이다. ‘자아’의 매듭은 ‘파르르 목을 꺾기’도 하지만 ‘쳐다보는 사람 하나 없다’로 비극적 결말을 유도하고 있다. ‘변압기’를 통한 인간성 상실은 ‘세상’에 자신의 치부를 내보이는 것이다.

 

일상의 틀에 갇혀 있던 ‘여자’는 끝내 ‘절망’으로 치닫고, 시적 대상이 되어버린 ‘변압기’의 중심축은 ‘본질’과 ‘현상’으로 관습에 서성대는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시인은 자신의 ‘퍼스나’로 언어의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시인 전건호의 시적 의미의 정형은 논리적인 틀에 숨죽이고 있던 언어의 틀에 대한 자기 자신의 몸부림이다. 낡고 쓸모없는 관습과 가치로부터의 탈출은 존재의 시어를 찾아가는 도정이며 고통스런 과정이지 않을까. 그의 지평은 실제적 현상에 대한 체험의 산물이다. 문학은 시는 현실의 가려진 부분을 시인의 눈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이다. 시적 대상의 내면에 숨겨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인은 현실의 과녁에서 진실의 과녁을 통해 감수성의 언어를 부활시키고 있다. 시, 그 의미의 과녁에 화살을 쏘고 있다.

 

 

 

3. 박소영의 <나날의 그물을 꿰매다>

 

현실의 부조리를 시의 그물을 통해 시인 박소영은 자신의 시공 속에서 연상적인 시어들을 나열하고 있다. 앞서 전건호의 시가 그렇듯 현대시가 주는 의미는 다양성과 통일성이다. 그녀는 존재에 갇혀 버린 인간의 지각을 냉혹한 시선으로 무감각한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심어 주고 있다.

 

성서에 나오는 여성 ‘막달레나 마리아’와 ‘카미유 클로텔’ 그리고 ‘아들의 아들’ ‘어린아이’ ‘그물을 꿰매는 남자’는 실상과 허상의 착시 속에서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돌아오는 시인의 욕망은 직관적 사유에 근거를 두고 그 틈 속에서 의미성을 부여 한다. ‘어떤 죽음’은 ‘지렁이’로 대치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보여 지는 것 보다는 내면의 진실을 보여 줌으로 새로운 시의 의미를 시도 하고 있다. 박소영 그녀는 곳곳에서 현대시의 억압과 분노를 시적 스펙트럼으로 분출하고 있다. 시의 열망이란 대상과의 자연스런 교감에서 이루어 낸다. 억지를 피워 독자를 난감하게 해서는 안 된다, 설명보다는 시적 언술이 가지는 빛나는 해석으로 상투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아/기원전이나 지금이나/아침과 저녁이 둥글어지며 반복되듯/선과 악이 바퀴살을 이루어 굴러가는/수레에 올라 있다

-사마리아 여인-중에서

 

이라크 전장에서 보내온 아들 메일에/- 친구, 다리가 하나 없는데 함께 가도 될까요/어머니는 네가 불편하니 와서 일주일만 같이 있으라 했다/다시 메일이 왔다/- 그 친구 두 팔도 없는데 괜찮느냐고/네가 너무 불편하니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그후 또 한통의 메일이 왔다/그 아들이 자살했다는 통보였다/아들은 어머니 가슴에 다시 죽었다/그 아들이 오늘도 죽어간다//아들과 어머니/그리고 어머니, 어머니./불타는 얼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어머니는,

-사월에 온 소식-중에서

 

무창포 선착장 빈 배에 앉아/그물을 꿰매고 있는 남자/제사장처럼 경건하다/세상의 모든 상처를 꿰매달라고 하고 싶다//중략//밀물이 도둑처럼 살금살금 들어오자/하늘에는 걸릴 수 없는 무지개가/찬연히 뜨는 선착장/맨발의 햇살이 물 위를 걷는다

-그물을 꿰매는 남자-중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사랑의 독은 죽음보다 깊고 어둡네//쥐면 쥘수록 새어나가는 물 같은 사랑이여//눈물로 강을 이루어 갈 수 있다면/내 몸 다 마르도록 울 수 있는데//내 사랑은, 마침표가 없다/사랑이여 내 눈물의 바다를 배로 건너와/항해에서 온다면/소금기 묻은 귿대 발을/은대야에 새벽이슬 받아 고이 씻겨주리라//그대 사랑에 무릎 꿇어 입맞춤하리라

-카미유 클로델과 막달라 마리아처럼-중에서

 

 

삶과 죽음, 상처와 치유 그리고 보편적 인식의 통로에서 현상학적으로 표현되어지는 시의 종자는 기대와 불안으로 시인에게 다가오고 있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언어는 숭고한 죽음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던 예수의 고난과도 흡사하다. 죽음은 삶이며 죽음을 통해서 또 다른 세계에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고리도 결국 사랑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려 한다. 상처의, 섭섭했던 마음과 치유도 사랑의 완성에 이르고서야 안심을 한다. 신의 사랑 앞에 한없이 낮아지는 시인의 감수성은 상처의 확인이지 않을까. 나의 상처위에 너의 상처가 또 다른 의미의 상처로 깨우침의 길에 서 있는 중이다.

‘아들’과 ‘어머니’로 ‘카미유 클로델과 막달라 마리아’로 세계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 아픔 속에서 유대감을 가지게 된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이 되는 사랑은 영혼의 교감이며 소리 없는 정적 안에서 그윽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인간의 사랑도 마지막 선택은 신의 영역에 속한 사랑으로 그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시의 틈으로 보는 세상은 보여 지거나 만져지는 것은 아니다. 시적 의미로 인식되고 느껴지는 존재의 작은 틈이다. 영혼이 들어오는 순간 대상에 대한 혁명이 일어나며 각각의 현상들은 시인의 정신과 애정 속에서 그 뿌리를 내린다. 이러한 조건의 충족들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4. 이형자의 <미용실의 봄>

 

셀리는 “창조하는 정신은 꺼져 가는 석탄불과도 같다.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종잡을 수 없는 바람처럼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했다가 잠깐 동안의 밝음을 가져다 줄 따름이다.”라고 말했다. 이형자가 느끼는 시의 감정은 “모처럼의 살내음” 같이 시는 근원적인 소문이 시적 언술로 변화하기도 한다. 대상의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의 이유들과 그 대상의 상태를 기쁨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시적 진보와 마음에 기쁨을 주며 시적 장식 언어는 여러 부분에 적절히 삽입되어 인간의 카타르시스를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시의 주된 원료인 언어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대상과 대상사이의 관계성과 연민을 알게 해주고 있다.

 

한도 끝도 없이 내어주고

또 줄게 없나

밤새 수런거리는 날

 

-중략-

 

팔남매 키워내신 어머니

푹푹 속 썩힌 날이

훈김처럼 무럭무럭 솟아나는

 

자꾸 뜨거워져 끝내는

흔적도 울화도 없는

마지막 순교 아니던가

 

자꾸만 몸이 뜨거워진다

-뜨거워지는 이유-중에서

 

밤새 수런대는 이야기도 결국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런 비교 시어는 ‘한약’의 쓴맛이 ‘훈김’으로 ‘마지막 순교로’ 극히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맛을 내고 있다. 이형자의 시어는 중요한 두 개의 사실을 열거해 놓고 그것들을 서로 조명하게 하여 이해의 폭을 돕고 있다. 두 가지의 대상이 서로 용해되어지는 과정에서 이루어 내는 시의 ‘지름길’이 ‘의미’로 옮겨 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주먹을 쥐어보면 안다

 

엄지를 맨 위에 얹고

꼭 쥐어보면

검지 장지 순으로 손가락 넷이

꼬부라져 한 덩어리 주먹이 된다

스스로 향해 꼬부라져

엄지를 받치거나 세울 뿐

생색이나 불평은 티끌만큼도 없다

 

나를 사랑하느라

당신을 그리워하느라

우리를 보듬느라

밑으로 꼬부라질 줄도 아는 질서

 

오므릴수록 더 아름답다

-동행-전문

 

 

시인의 시적 화자는 은유와 직유를 적절히 배치하면서 온다. 시란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다. 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도중에 증발시켜 버리면 시의 이미지는 더 이상 시 속의 다른 이미지와 연결성을 가질 수 없다.

이형자의 시는 소박하고 작은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우리들 이웃의 일상들이다. 누구나 다 쥐어 볼 수 있는 ‘주먹’에서 ‘검지’ ‘장지’ 순으로 꼬부라져 한 덩어리가 되는 ‘주먹’ 생색이나 불평 없이 서로를 보듬고 가고 있다. 오므릴수록 더 아름다운 ‘동행’은 낮아져 비로소 빛이 나는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 이시의 전체는 4행으로 나뉘어져 제 각각의 이미지들을 하나로 모아 잊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슬픈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행에서 더 분명해지는 “오므릴수록 더 아름답다”는 것은 이 시를 쓰게 만든 시인의 감정인 것이다. 지극히 간단한 언어와 짧고 평범한 단어에서 독자는 공감을 하지 않을까.

 

점심을 먹다가/생선 가시가 목에 걸렸다/숨도 쉴 수 없고/금방이라도 전신을 마비시키는/

그 힘//한 참 동안 컥컥 소리 내며/몸부림을 치다/빠진 가시를 보니/겨우 5밀리밖에 되지 않는/물렁한 침이었다//크다고 힘이 세고/적다고 힘이 없는 게 아니었다

-생선 가시-전문

 

우리의 입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몇 마디의 말들도 리듬을 지니고 있다. 일상적인 리듬에서 빚어내는 일상의 회화는 1행에서 그 시작을 열고 있다. ‘가시’는 ‘전신’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결코 크다고 힘이 세지는 않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다고 적은 게 힘이 없다 라고도 하지 않는다. 시적 언술의 판가름은 철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시인의 ‘영감’마저 건네주고 마음을 두근대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 자신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슬픔과 기쁨과 생의 바닥에 고여 있는 황홀함을 느끼려 한다. 이형자의 시가 독자들에게 주는 목마름의 근원은 에돌고 스쳐 지나가는 우연들을 시적 메시지로 상승시키려는 의지에 있다.

실제적 지평 안에서 한결같은 리듬감으로 토해내는 생의 소소한 이유가 바로 이형자 시의 매력이다.

 

 

5.

시는 삶보다도 죽음보다도 더 강한 중독성이다. 뜻밖의 정경을 만나는 곳에서 부터 시는 출발한다. 생활시, 또는 현대시는 현실의 재현어로 시적 언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시인의 넋두리를 듣고자하는 게 독자의 꿈은 아니다.

시의 세상은 자신의 고통과 아픔 대상에 대한 설명보다는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시 쓰기가 되어야 한다. 세계에 대한 노래는 보다 더 구체적이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영혼의 본질까지도 간파하여 만남과 상상과 이미지적 연상으로 놀라운 변화를 연출해야 한다.

이는 시인의 새로운 감수성의 변혁에서만 이루어진다. 삶의 가치는 불가해한 것에서부터 나오지 않던가. 낯선 사람에게 낯선 언어로 건네는 낯익은 언어들의 유희. 시인의 발아래, 혹은 독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세상의 화두로 던져지는 시는 궁핍으로 엎드려 있는 현대인에게 환상의 폭풍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2011 시와 경계 봄호

- http://blog.daum.net/demang815/15791201 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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