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흔적
방 민 호
이것은
나풀거리며 떠다니는
나비
어느 가냘픈 어깨 위에 앉았다
내가 손가락을 살며시 뻗어 잡으려 하자
포르르 날아오르는,
또 어느 까만 머리칼 위에 앉았다
내 한숨이 짓는 공기의 파동에
깜박이듯 날아올라,
아득한 봄날
하얀 햇살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나비
앉았다
날아오르고
또 어느 꽃 위에 앉아
기억의 손가락을 기다리는
이것은
나비
이 가벼운 질량
이 끈질긴 생명
- 방민호 시집,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실천문학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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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낭만주의자의 달콤한 되새김
- 방민호 시인의 「사랑의 흔적」을 읽고
사랑을, 사랑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이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 내가 지나온 길의 흔적이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낡거나 색 바래지 않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사람, 또 그와 함께 했던 아름다운 순간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본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한순간 말랑말랑하게 풀어지는 것만 같다.
지나간 사랑은 누구에게나, 또 언제나 이토록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누군가에게 두고두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새겨질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들일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헤어지는 순간 아예 몰랐던 사람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시대의 사랑이란, 그렇듯 항상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수없이 보고 듣고 또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어떤 가수는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라고 노래했다. 꼭 그 예를 들지 않더라도 노래나 시를 통해 만나게 되는‘사랑’과 ‘나비’의 결합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방민호 시인의 「사랑의 흔적」 또한 ‘사랑’을 ‘나비’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나비’는 다른 노래나 시들 속에서 만나는 나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없이 아름다운 한 마리의 나비이다.
이것은
나풀거리며 떠다니는
나비
어느 가냘픈 어깨 위에 앉았다
내가 손가락을 살며시 뻗어 잡으려 하자
포르르 날아오르는,
삶이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끝없는 여정이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손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손가락을 살며시 뻗어 잡으려 하자 / 포르르 날아오르는’한 마리 나비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그만큼 더 아름다워지는 게 아닐까. 사랑이란, 아니 삶이란 결국 다다를 수 없는 궁극의 순간을 찾아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기에.
또 어느 까만 머리칼 위에 앉았다
내 한숨이 짓는 공기의 파동에
깜박이듯 날아올라,
아득한 봄날
하얀 햇살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나비
떠올릴수록 아득해지는 한때의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본다. 쏜살같이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그 시절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간직한 사람의 얼굴. 그와 함께 수놓았던 헤아릴 수 없는 순간들이 가끔씩 가슴 한 구석을 파고드는 통증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 아픔조차도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쉬는 ‘한숨이 짓는 공기의 파동에 / 깜박이듯 날아’오르는 얼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아득하게 사라져 가는 사람의 뒷모습.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문득 내 곁에 와 머무르는 황홀한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내 영혼에 수놓아진 사랑의 흔적들이다.
잊을 수 없는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아름다운 추억이어야 하리. 문득 떠올릴 때마다 서늘한 마음 한 구석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사람이어야 하리. 지금 이 순간을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과거의 한때이어야만 하리. 운명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대여, 나 또한 그대의 운명으로 자리매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앉았다
날아오르고
또 어느 꽃 위에 앉아
기억의 손가락을 기다리는
이것은
나비
이 가벼운 질량
이 끈질긴 생명
가볍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흔적’은 내 영혼의 어디쯤에 새겨져 있을까? 그것은 나로 하여금 삶을 더 뜨겁게 살아가게 만드는,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비록 무딘 펜으로나마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쓸 수 있도록 해 주는, 내 시의 뿌리이기도 하다.
사랑이여, 지금이야 비록 막막할지라도 우리가 겪는 이 순간이 서로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흔적’으로 선명하게 새겨지기를. (박완호 시인)
- 계간 [주변인과 시] 2011년 봄호
- http://blog.naver.com/parkwanho/20103240063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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