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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인 칼럼] 시인들이 남긴 일들 3 - 땅에 묻어두었던 목월의 시 / 허만하 시인

문근영 2014. 3. 28. 10:55

 

[시인 칼럼] 땅에 묻어두었던 목월의 시
시인들이 남긴 일들 3
 
허만하시인
(기사제공 = 현대시학)
 
1.
일제 말기의 어둠이 점점 짙어 질 무렵, 모국어로 시를 쓰던 사람들 거취의 하나를 젊은 시절의 목월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일본 도쿄에서 대학에 다니던 윤석중은 어느 날 불쑥 도쿄에 공부하러 나타난 목월을 만나게 된다. 목월은 윤석중이 세들어 있던 집 2층 방에서 하룻밤을 유하고는 떠난다. 방학 때 고국에 다니러 온 윤석중은 일부러 경주 건천의 목월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으면서 밤새워 동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 자리에서 윤석중은 <발표할 때도 없고, 불러줄 아이도 없는 노래를 지어서 무얼하누>라는 푸념을 하였다. 이때 목월은 정색을 하면서 땅을 파고 묻어두면 되지 않느냐고 대든다. 윤석중이 쓴 「그와의 사귐」(『심상』, 1978년 5월호)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이 회고에 나오는 목월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응수는 목월의 체험에서 우러난 목소리였다. 목월은 사실 그때 모국어로 시를 쓰고 그것을 항아리 속에 넣어 모량리 초가집 땅에 묻어 두었던 것이다.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홀로 떨어지는 작은 풀열매」라는 시다. 이 시는 은유로 이루어져 있는 젊은 날 목월의 자화상이다.
 
꿈을 꾸네
꿈을 꾸네
대낮에도 구우는
흰 수레바퀴
 
스스로 사모하는
나의 자리에
가는 숨결 고운 시간 꿈의 자리에
나 홀로 떨어지는 작은 풀열매
-「홀로 떨어지는 작은 풀열매」 전문
 
이 시 한 편은 항아리에 들어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햇빛을 본 것은 1973년 봄 일이다. 그는 그때까지 이 사실을 가슴 깊이 숨겨 두었었다. 낮에는 농군이었던 그는 밤이면 램프 불을 밝히고 시를 쓰고 그것을 항아리에 넣어 땅에 묻었던 것이다. 나는 나 홀로 떨어진 작은 <풀열매> 한 알의 운명을 마태복음 13장의 가시덩굴 속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에 비추어 이해한다. 이 시를 쓸 무렵의 단석산 산자락 초가삼간 한 봉창을 외롭게 밝히던 오렌지빛 불빛은 목월의 가슴 안에서 꺼질 줄 모른다. 그의 시 「孝子洞」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仁旺山은 해질 무렵이 좋았다.
보랏빛 山巍 어둠에 갈 앉고
램프에 불을 켜면
燈皮에 흐릿한 무리가 잡혔다
-「孝子洞」에서
 
시의 뿌리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다. 때로는 개체를 넘어선 선조의, 또 그 선조의 아득한 경험에 그 우윳빛 실뿌리를 뻗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소개하는 「홀로 떨어지는 작은 풀열매」는 후에 전개된 목월 시의 씨앗이 된다고 믿고 나는 내 시 이해의 분도기를 여러 각도에서 이 습작기 작품 위에 견주어 본다. 나는 이따금 시를 발생학적 과정에서 살펴보는 취향이 있다.
 
2.
목월의 산문시 「俗離山에서」(최후의 시집 『無順』, 1976년 수록)의 호텔 바깥 창에 붙어 있는 말매미도 사실은 어릴 적 목월이 경주 건천에서 잡고 놀았던 매미라 나는 짐작하는 것이다. 목월 자신은 자연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은 <앙감>이라 불렸던 건천의 모량리 마을에서 얻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여름이 되면 모량리 온 마을은 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그가 남긴 관찰에 따르면
 
참매미는 가죽 나무의 낮은 가지에 붙어 울고 말매미는 가장 높은 가지에 붙어 운다. 참매미 울음소리는 시롱시롱, 시롱새롱 우는 금속성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는 데 비해서 말매미는 덩치가 참매미에 비해서 클 뿐 아니라, 온몸이 烏金칠을 한 듯 새까맣게 빛났다. 날개에는 금빛 줄무늬가 섬세하고, 울음소리도 우렁찼다. 그런데 참매미는 뒷꼭지에 투명한 초록빛이 아름답고, 덩치는 작지만 야무지게 생겼다. 
 
파브르의 '곤충기'를 생각나게 하는 「목월의 곤충기」의 한 대목이다. 
 
자고나니, 호텔 바깥 창에 말매미가 붙어 있었다. 새벽어둠 속에서 혹은 빛 속에서 날개를 접은 말매미의 어른어른한 눈.
銀髮이라기엔 좀 이른 머리를 하고 나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싯거먼 눈으로 오래 동안.
그날 오전에 속리산을 떠났다.
-「俗離山에서」 부분
 
목월에게는 또 「夏蟬」(시집 『경상도의 가랑잎』, 1968년 수록)이란 작품이 있다. 이 시의 끝에서 만나는 종일/烏金의 날개를 부벼대는/매미소리를 듣는 것으로 마음이 흡족했다
는 구절의 배경에도 목월이 매미를 잡고 놀았던 <앙감> 어린 시절이 보라색 산그늘처럼 스며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시간의 물길을 한 마리 은어처럼 거슬러 오르는 것이다.
 
3.
목월 자신은 별반 좋아하지 않은 작품이겠지만 그에게는 「시원한 半圓」이라는 시가 있다. 한국전쟁 1·4후퇴 후 대구에서 발간된 '코메트'(공군 정훈감실 연계 창공구락부 발행)지에 발표한 시다(일자 미상). 나도 이 잡지의 청탁에 따라 「잎」을 발표했었다. '문학예술' 초회 추천을 마치고 두 번째 작품을 준비 중이던 1957년의 초엽 일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적당히 팔을
저으며
너는
거리를 가리라
먼 사람아. 
 
적당히 팔을
저으며
나는
거리를 걷는다.
먼 사람아.
 
먼 사람아.
내 팔에
어려오는
그 서운한
半圓
 
내 팔에
어리는
슬픈 運命의
그 보랏빛 그림자처럼…
 
그림자처럼
나는 팔을
消失한다.
손을 들어
── 「서운한 半圓」
 
사람의 보행을 기하학적 틀 안에서 읽어낸 목월의 실험성이 눈에 띈다. 그는 이 시에서 정감을 의도적으로 말살한 논리의 미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그 무렵 나는 읽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전신을 시도하려는 목월의 몸부림을 느꼈었다. 그에게 붙어다니는 민족적 정서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움을 느꼈었다. 동시와 시의 한계선을 지적으로 지운(조지훈) 목월에게는 세계의 추상미를 읽어내는 이러한 수련이 그의 시의 반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을지 모른다. 시집 『晴曇』에서 보는 「傾斜」, 「迂廻路」를 거쳐 마지막 시집 『無順』 수록의 「밸런스」를 위시한 「廻轉」, 「맨발」, 「路上」, 「無限落下」 등 일련의 작품은 이 「서운한 半圓」의 연장선 위에 자리하는 것으로 나는 읽는다.
水平으로 양팔을 벌리고
渾身의 集中으로 밸런스를 잡는다.
水平臺 위에서.
라는 것은
그것으로 나는 垂直的
자세를 가다듬는다.
너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 「밸런스」에서
 
이 가운데서 「迂回路」를 나는 주목했다. 그것은 이 시의 모티브가 느낌에 흐를 수밖에 없는 실생활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가을에(정확하게는 10월 12일) 갑상선 악성 종양 수술을 위하여 세브란스 병원 2층 335호실에 입원 중이던 부인을 찾아 갈 때와, 수술이 끝난 뒤의 부인을 만날 때의 사정을 다룬 작품이 이 「迂回路」이기 때문이다. 
─목월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고, 우리 어린것들 앞길 축복하여 주소서. 아멘─이란 기도를 하고 몸을 돌려, 목월을 향하여─여보 아무 여한도 없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수술실 유리문 안으로 실려 들어가던 부인을 바라보아야 했던 무렵을 소재로 한 시가 어떤 표현을 나타낼까 궁금했던 것이다. 목월이 일말의 감상도 끼어들 틈새를 보이지 않는 냉정한 記述로 19행을 시작하고 끝마치는 수법을 택한 사실을 눈여겨본 것이다. 더 후기에 만나는 「밸런스」에서 보는 완벽한 추상적 표현에 이른 것은 아니더라도 그의 새로운 기법은 이 무렵부터 그의 시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昏睡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微笑.(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迂回路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야 螺旋通路를
내가 내려간다.
- 「迂回路」에서
 
목월 자신도 이 시의 실험성을 말하고 있다.
 
또 한번 「暗中摸索」의 새로운 試鍊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 試驗品이 思想界에 發表한 「迂回路」요, 「深夜의 커피」다./이 試驗品이 어떻게 完成되어 갈지 나도 모른다./물론 나의 作品을 늘 보아온 讀者에게는 눈에 두드러지는 變貌나 變化를 느끼지 못하리라./당연한 일이다. 나의 호들갑스러운 이야기가 作品에서는 겨우 言語의 壓縮이 약간 强하다거나, [人生]이라는 말이 탈락 되었다거나, 그만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陶磁器를 빚는데, 손길이 좀 더 섬세하다거나 거칠다는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서운한 半圓」을 한국이라는 농경사회 공동체에서 보기 힘든, 이색적인 작품이란 해석만으로 넘어갔던 『코메트』 무렵의, 깊이 없는 내 시 읽기를 이 자리에서 바로잡아 본다. 「서운한 半圓」은 그의 실험성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목월이 다루려했던 새로운 미학이 그의 시에서 큰 흐름으로 자리 잡기 전에 그는 하직하고 말았던 것이다. 목월 시의 주요한 한 갈래는 묻혀져버릴 수 없다. 그는 김춘수처럼 그의 시에서 지속적인 변신을 추구했던 큰 시인이었던 것이다.
 
4.
1962년(5·16 군사혁명 다음해) 12월 3일 목월은 시인 朴南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탁 받은 원고를 끝 낸 뒤에 찾아든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전화였다. 서로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참에 박남수는 최근의 목월 작품이 <퍼졌다>는 진솔한 평을 한다. 이 말을 듣고 목월은 최근에 발표한 그의 작품이 시적 표현에 대한 절박한 진실감이 부족하다고 자성한다. <절대적 표현>을 추구하는 박력이 모자란다는 자성을 그는 그의 일기에 쓰고 있다.
 
나의 작품은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여분을 가지는 것이며 이 여분이야말로 시를 절대의 경지에서 타락시키는 가장 큰 위험물이다. 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한마디의 말의 여분도 부족도 보충도 허락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느슨한(푸근한?) 톤이 행여 자기의 산문적 문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회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허버트 리드의 「현대시와 개성」을 읽으며 앞으로의 자기 시의 문맥을 찾는다. 시적 업적의 성취를 위하여 정진하는 목월의 모습은 바깥에서 보는 그의 인상과는 달리 안으로 치열했던 사실을 나는 이 대목에서 피부로 느낀다. 목월이 릴케의 세계를 만났던 것은 언제인지 확실치 않으나, 내가 일찍 릴케를 알았더라면 내 시가 더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시인에게 만남은 거의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발레리와의 만남이 없어 보이는 목월이 발레리가 말했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시를 위한 그의 훈련이 범상한 것이 아니었던 것을 짐작케 한다. 목월은 완벽한 시를 위하여, 여분도, 부족도, 보충도 허용하지 않는 가차 없는 상태의 시를 상정하고 있다. 그 절대적인 상태에 이를 때까지 시를 깎고 다지고 다듬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을 묵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발레리에게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고생하여 시를 짓는 훈련을 계속한 탓인지, 나에게는 모든 언설과 문장을 거의 언제나 재차 고치고는 변경을 가하는 일이 가능한 작업의 상태로 간주하고 이러한 작업 그 자체를 일반 사람들이 생산물에게 부여하고 있는 가치보다도 훨씬 훌륭한, 그 고유의 가치를 가진 것으로 보는 습관이 붙어 있다.(강조 원 저자)

- '시인의 수첩'(1928)
 
두 시인이 살았던 시간과 공간은 달랐을지라도, 또 시의 성질이 대조적인 면을 보이면서도 시의 100퍼센트 순도를 지향하는 이념에서는 신기하게 두 사람이 일치하고 있다. 발레리는 위의 저서에서 한편의 시에는 그것에 포함되는 순수시의 분량만큼의 가치가 있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순수시를 절대시라는 말로 바꾸어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하기도 한다. 목월이 심정적인데 비해서 발레리는 전적으로 지적인 점이 두 시인의 시적 체질의 현저한 차이다. 그리고 발레리는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1)를 바탕으로 그의 사유 또는 시적 산문을 펼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완전무결한 시구는 시인의 각고의 수련 끝에 얻어질 수 있다는 믿음과 또 그것을 지향하는 각고의 노력이 가지는 가치를 승인하는 면에서는 두 시인은 신기하게도 동일하다. 그들은 관성적인 시 쓰기에 대한 채찍으로 아직도 싱싱하게 살아 있다.
 
5.
이 두 시인이 한 때 조선일보사 옆 옛 원자력병원 앞에 있던 <유성>이란 2층 다방에서 자주 만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나는 그때 원주에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다. 주말이면 더러 서울에 나가서 이 골목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숨 쉬며 돌아보곤 했었다. 서울신문사에 있던 박성룡과 드물게 이 다방에서 만나기도 했었다. 그 때 계단을 내려가는 두 시인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저분이 박목월 선생이고 그 옆이 박남수 시인이라 일러 주었던 것이 박성룡이었다. 이러한 일상사는 기억에서 사라짐직 하나, 이 글을 초하는 오늘 문득 그때의 정황이 떠오르는 것은 서울신문 문화면 한 쪽 구석 조그마한 소식란에서 그들 근황을 활자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그 말미에 내 이름이 따로 있었다). 그래서 비교적 한산했던 그 다방 이름과 두 시인의 영상이 역광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一然 스님이 남긴 遺事라는 문학적 형식에 기대어 목월과 박남수 시인이 한국에서 가졌던 마지막 만남 장면을 떠올려 본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은 바로 이별의 장면이 된다. 박남수 시인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날 때 이 사실을 끝까지 비밀에 부쳤었다. 그의 이 침묵은 그 무렵 일본의 신문에서 화제가 되었었다. 약간의 정치적 뉘앙스를 풍기는 기사였던 것 같다. 막 김포공항 출구를 나서려는 박남수 시인은 헐레벌레 숨차게 뛰어오는 목월의 모습을 보게 된다. 가까이 다가선 목월은 느닷없이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봉투 하나를 꺼내서 박남수 시인에게 전한다. 이 봉투를 펼쳐 본 박남수 시인은 뜻밖에도 그 안에 들어있는 구두표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구두표 한 장이 아니라 목월의 당황과 우정이 범벅이 된 이상한 증표였다는 것이 박남수 시인 이야기였다. 한국시협을 함께 만들고 그 울타리 안에서 같이 일했던 목월에게도 박남수 시인은 개별적으로 이민 소식을 숨겼던 것이다. 그야말로 조용히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출발 당일 이 소식을 접한 목월은 아무런 전별의 준비 없이 바로 공항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목월 이외에 공항에 모습을 보인 시인은 아무도 없었다. 전봉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박남수 시인은 한국을 떠났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1979년 5월 18일 저녁 미국 플로리다주 데이토너 비치에서 멀지 않은 그의 집에서 묵을 때 들었던 이야기로 이번에 처음 이 지면에 피로하는 유사다. 그는 전봉건이 다달이 부쳐주는 '代詩學'으로 고국의 시를 접하고 있었다. 그 날의 그의 이북 사투리에는 한국의 시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벌써 30년 남짓한 세월의 저쪽 이야기지만 둘이서 새벽기운을 느낄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고요했던 그 날 밤 분위기는 잔잔한 물결처럼 밀려든다.

허전함을 전화로 달래었던 두 시인의 삶은 벌써 잊혀진 것이 되고 시만이 앙상하게 뒤에 남아 있다. 풍화는 지구의 껍질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풍화는 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허만하/ 1932. 시인. 병리학 전공의 의학박사. 고신대 의대 교수를 정년 후 왕성한 시작활동으로 형이상 시의 새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 해박한 식견과 문장으로 품격높은 산문들을 보여줌. 시집으로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낙타는 십리밖 물냄새를 맡는다','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외 여러 권이 있으며, 산문집 '청마풍경''길과 풍경과 시''모딜리아니의 눈'등이 있다.
 
-'문화저널21'에서

출처 : 시하늘
글쓴이 : 보리향(菩提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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