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대자보'에서 퍼왔습니다.>
| 이경숙: 실용주의와 역사의식 사이에서 | ||||||||||||
|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5공의 역사적 상흔을 성공의 디딤돌로 삼아 | ||||||||||||
| ‘흠보다는 능력’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이 2007년 12월 25일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된 후 이경숙은 “오랫동안 총장 업무를 수행하며 실용주의적인 이미지가 많았던 것이 인정받은 것 같다”며 “이 당선자가 섬기는 리더십으로 국정운영을 하겠다는 태도를 가지신 것이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리더십과 맞다고 생각해 인수위원장으로 일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1) 첫 여성 인수위원장이고, 숙명여대를 발전시킨 최고경영자(CEO)형 총장이라는 점 때문에 이경숙의 인수위원장 임명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1980년대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위원과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11대)을 지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수위원장으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경숙이 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된 것은 12월 25일이다. 이경숙의 말에 따르면 이날 오후 4시쯤 이명박 당선자로부터 직접 인수위원장에 임명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 전날인 24일 이명박은 이경숙을 인수위원장으로 점찍어놓았지만 내부 반발이 있어서 25일에야 인수위원장을 임명했다. 내부 반발이 있었던 것은 이경숙의 국보위 전력 때문이었다. 24일 이재오 의원이 이명박을 찾아가 2시간 동안 “첫 인사인데 국민들에게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 인물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은 ‘이미 20여 년 전의 일이고, 그 뒤에 대학총장을 네 번이나 잘 하지 않았냐’는 취지로 오히려 이재오를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2) 이명박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최시중 전 한국갤럽 회장 등 이명박 주변의 원로그룹도 “단점만 찾으면 한도 끝도 없다”며 이경숙을 적극 천거했다.3) 이명박은 이경숙을 진작부터 인수위원장으로 점찍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선 직후 이명박은 한나라당 내 소장파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여성 대학 총장이 인수위원장으로 어떠냐”고 묻기도 했으며, 2007년 10월 선대위를 꾸릴 때 공동선대위원장직을 이경숙에게 제안하기도 했다.4) 이경숙은 공동선대위원장직은 고사했지만 이번 인수위원장직은 수락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학교가 방학 기간이고 2개월만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어서 기간도 짧다. 나는 실용주의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니까 열심히 해서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5) 이경숙을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을 두고 많은 비판이 제기됐다. 가장 문제시 됐던 것은 이경숙의 국보위 전력이었고, 그 국보위 전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명박식 인사와, 아울러 국보위 전력에 대해 역사적 평가가 끝난 것 아니냐는 식의 의견을 표출했던 이경숙의 태도였다. 『한겨레』 정석구 선임기자는 이번 인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이 당선자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협조했던 이경숙 숙대 총장의 전력을 깃털 하나의 무게만큼으로도 여기지 않고 가볍게 날려버렸다. ‘네 차례나 총장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는데, 그게 무슨 흠이냐?’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과거 전력은 다 덮어놓고, 도덕성 같은 거 따지지 말고 능력을 갖춰라! 부동산 투기를 해서 치부를 했건, 위장전입 전력이 있건, 음주운전 사고를 냈건, 능력만 검증되면 성공할 수 있다! ‘이명박과 함께하는 국민성공 시대’의 비결을 국민들에게 정확히 가르쳐준 셈이다.”6) 이경숙의 인수위원장 임명은 이명박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라는 평을 받았다. 『한겨레』의 황준범 기자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첫 인사는, 5공 출범 때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을 지낸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의 발탁이었다. 이경숙 총장을 25일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하는 데 당내 반발이 적잖았지만, 이 당선자는 자신의 구상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도덕성’이나 ‘역사적 평가’보다는 ‘실적·능력·효용’을 최우선으로 따지는 그의 인사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라며 이명박의 인사 스타일에 대해 평했다.7) 또 이명박이 장로로 있는 소망교회 권사인 이경숙이 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되자 소망교회 인맥에 시선이 쏠리기도 했다. 여러 비판이 제기됐지만 이경숙은 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된 후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초 ‘얼굴마담’으로 전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불식시키듯 그는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여러 실무를 직접 챙기고 있다. 총장 재임 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숙명여대의 발전을 일구어냈던, CEO형 총장 이경숙이 인수위원장이 된 후 인수위는 언론지상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며 향후 5년 동안의 정책을 세우고 있다. 수석 입학, 수석 졸업
“경기여고 졸업반 때인 1961년 숙대가 전국 고교생 학력 경시대회를 열었다. 거기서 1등을 했다. 학부 및 대학원 전액 장학금에다 유학 지원, 교수 임용 보장 등의 파격 조건이 뒤따랐다. 당시 교수가 무척 되고 싶었는데, 내 소원을 알았던 담임선생님이 ‘서울 법대도 좋지만 교수를 하려 한다면 이곳이 낫겠다’고 조언했다. 말하자면 숙대와 내가 서로에게 끌린 것이다. 너무 귀한 인연이라 생각한다. 숙대가 나를 이만큼 키웠다.8) 4학년 때 숙명여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1965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숙대 대학원에 진학해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 196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 숙명여대 총장을 비롯한 수십 명의 환송 인파가 그를 전송하기 위해 공항에 나왔던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는 숙명여대의 자랑이었다. 이경숙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기독교도가 된 것은 유학 시절이다. 동양계 유학생이 드물었던 시절 그는 타국에서 문화적 괴리와 언어 등의 문제로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경숙은 당시 호스트 패밀리(Host family, 유학생과 미국인 가정을 연결)제에 의해 아이오와에 사는 제닉 씨 부부를 만나 방학이나 휴가 때 함께 지냈는데, 이 부부의 삶을 보고 기독교도가 된다. “그분들이 제게 쏟는 사랑과 배려는 저의 상식선을 넘는 것이었어요. 제 구두를 깨끗이 닦아준다든지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를 타자가 서툴러 제대로 치지 못하자 밤새워 대신 쳐주곤 했지요. 불편해할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며 편안함을 만들어주던 그분들의 행동이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자 저도 주저 없이 교회 출석을 시작했습니다.”9) 이경숙은 후에 기독교 신앙이 유학 생활을 버티게 해준 힘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71년 미국 캔자스대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경숙은 1975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및 비교정치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내 여성 정치학 박사 3호였다. 그리고 1976년 귀국한 그는 숙명여대 교수로 임용됐고, 1980년에는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임명된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역사적 평가는 끝났다? 여기서 잠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대해 알아보자.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부터 알아야 한다. 1980년 5월 3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의장은 최규하 대통령이었지만 실질적 권한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에게 있었다. 국보위는 위헌적·위법적 기관으로 전두환이 정권을 잡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국보위에서 한 일은 삼청교육대 설립과 언론 통폐합이었다. 국보위는 이후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발효되면서 ‘국가보위입법회의’로 확대 개편된다. 국가보위입법의원은 총 81명으로 전두환이 직접 임명했는데 정계 20명, 경제계 3명, 학계 13명, 법조계 8명, 종교계 8명, 문화계 9명, 여성계 4명 등으로 이뤄졌다. 여성계 인사는 김정례 여성유권자연맹 회장, 김행자 이화여대 교수, 안목단 군경미망인회 회장, 그리고 이경숙 숙명여대 교수 등이었다.10)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과도적 입법기관으로, 1981년 4월 새 국회가 개원할 때까지 존속했다. 150일 동안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구(舊)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비롯해 118건의 법률안과 동의안이 처리되었다. 국가보안법이 개악된 것도 이때였다. 이경숙은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임명된 것에 대해, 그리고 1981년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4년간 활동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1976년 미국에서 귀국했다. 국내 여자 정치학 박사 3호였다. 당시 정권이 숙대와 이대 출신의 정치학 박사를 (구색을 갖추기 위해) 여성계의 비례대표로 찍었다. 한참을 안 한다고 버텼다. 하지만 끝내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 과정에 여러 이야깃거리가 있지만 지금도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경력 때문에 오해 받은 적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솔직히 지나고 보니까 얻은 것이 훨씬 많다. 국회 외무위원으로 활동하며 유엔 등에서 실무 경험을 쌓은 것이 지금도 도움이 된다. 또 국가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한 것도 총장 역할을 수행하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당시 쌓은 인맥이 음으로 양으로 많이 도와주고 있다. 공원 용지로 묶여 있던 학교 부지를 푸는 데도 큰 덕을 봤다.”11) 또 『신동아』 2006년 4월호에서는 “그때는 국가 비상 시기였고 끝까지 사양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소속 위원회가 외교통일위원회였습니다. 전공 분야였기 때문에 의원 활동을 하며 배운 게 참 많았어요. …… 국회의원 한 덕으로 만났던 정계·재계·관계 인맥이 학교의 해묵은 난제를 해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됐죠. 누구를 만나서 어떻게 풀어야 되는지 자문도 하고 사람을 연결해주기도 했죠. 국회의원 경험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12) 끝내 거절할 수가 없어서 입법의원이 됐다고 했지만, 일각에서는 다른 얘기도 들린다. 1980년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서 이경숙을 입법의원으로 영입하기 위해 만났던 이장춘 전 대사는 “억지로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사정을 얘기하자 이씨는 순순히 ‘하겠다’고 답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13) 사정이야 어찌 됐든 이경숙은 국가보위입법의원을 거쳐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까지 지내면서 5공 정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그러나 이경숙은 국가보위입법의원 전력과,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해 “입법의원은 이미 역사적으로 평가가 난 것 같다”고 말했다.14) 이경숙의 발언에 대해 백원기 인천대 법대 교수는 “이 위원장이 과거를 생각하는 태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며 “이 위원장의 성공의 기반이 역사적 상흔을 딛고 서 있다면 ‘낮은 자세’로 국민에게 사과를 먼저 하는 게 우선”이라고 비판했다.15) 손호철 서강대 교수도 다음과 같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백배, 만배 양보해 유신과 5공에 협력한 인사들은 그런 대로 봐줄 수 있다. 그러나 국보위만은 정말 ‘아니올시다’다. 국보위가 어떤 기관이었나? 전두환 일당이 1980년 봄 광주에서 수백 명의 양민을 처참하게 학살한 뒤 국회마저 해산하고 양민들의 피바다 위에 세운 초헌법적인 기구가 바로 국보위다. ……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반응이다. 이 당선자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 위원장은 최소한 과거의 행적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라 ‘27년 전 일인데 열심히 일하겠다’니 답답하기만 하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이 위원장의 표현대로 27년 일이니 만큼 이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를 했다면 눈을 질끈 감고 봐줄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래전 일인데 잊어버리지 왜 자꾸 시비를 거느냐’는 조이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허긴 이 위원장은 이전에도 자신의 국보위 경력, 그리고 이에 기초한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 경력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만든 인맥이 학교의 해묵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무얼 기대하겠는가? …… 모두들 신국보위 시대에 온 것을 축하하며, 국보위 만만세다.”16) 숙명여대의 놀라운 발전 국회의원 활동 이후 이경숙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숙명여대 정법대학장과 기획처장을 거쳐 1994년 3월 제13대 총장으로 선출됐다. 이경숙의 총장 재임 기간 동안 숙명여대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된다. CEO형 총장이라는 별칭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 총장 취임 당시 숙명여대는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경숙은 “총장에 선출되고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책상 위에 7억 8000만 원짜리 세금 고지서가 선물로 올라와 있을 만큼 학교 재정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17) 학교는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비전 또한 없었다. 그리고 학내 구성원들은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경숙은 학교 재정은 물론이거니와 학내에 만연한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1995년 2월 ‘제2창학 발기인 대회’를 열고, 2006년까지 1000억 원의 학교 기금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재원이 확충되지 않고는 학교 발전이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숙명여대가 모았던 금액은 도서관 건립 기금 2억 원이 전부였기에 교직원 등 대학 관계자들은 1000억 원 마련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경숙의 말을 들어보자. “국제정치학을 공부한 학자라서 현실 감각이 없다, 그 많은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느냐 등등의 말을 무수히 들었습니다. 세계적인 명문 여대가 되기 위한 교육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건물이 최소한 11개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1000억 원은 필요했지요. 동문들에게 호소하고, 신발이 닳도록 뛰어다니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18) 이경숙은 규모가 작은 숙명여대의 자산은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제2창학과 함께 숙명여대 동문들을 대상으로 ‘등록금 한 번 더 내기’ 운동을 벌인 것도 그런 이유다. 동문들은 이경숙의 행보에 적극 동참했다. 그 결과 2006년 5월 1000억 원의 기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취임 초기 이경숙을 괴롭혔던 것은 학교 부지 문제였다. 학교 부지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경원, 총무처, 국방부, 산림청 등 7개 부처에 학교 부지가 귀속돼 임대료를 내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당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어요. 첫 임기 4년 동안은 거의 매일 오전 7시에 나와 밤 10시까지 관련 부처 담당 공무원을 만나야 했습니다. 그린벨트로, 공원 용지로 묶여 있는 땅들을 학교 부지로 풀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찾아가면 반겨주기나 하나요. 무조건 안 된다는데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심하며 분초를 다투면서 뛰어다녔어요.”19) 그러한 노력 끝에 1994년 6000평이던 학교 부지는 2006년 1만 8000평으로 늘어났다. 성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총장을 4선 연임하는 동안 21개의 건물이 새로 건립됐고, 교수와 학생 수도 2배로 늘었다. 또 1998년 국내 대학 처음으로 학교 내에 무선 랜을 구축했으며, 2000년에는 국내 최초로 사이버대학원을 설립했다. 2002년에는 PDA 휴대폰 등 개인 이동통신기기를 통해 수강신청과 도서대출 등 학사행정은 물론 학자금 대출까지 처리할 수 있는 모바일 캠퍼스를 구현하기도 했다. 졸업생 취업률도 80% 선을 유지했다. 이러한 공로로 이경숙은 1999년 국민훈장모란장(정보화 부문)을 받았고, 2002년에는 한국능률협회에서 수여하는 ‘한국의 경영자상’을 받았다. 그리고 숙명여대는 4선 연임으로 그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섬기는 리더십 이경숙은 평소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해왔다. 그는 ‘미래는 카리스마적 리더십보다 남을 섬길 줄 아는 부드러운 여성형 리더십이 바람직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명령하고 군림하면서 ‘앞에서 이끄는’ 리더십이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리더십, 즉 섬김의 리더십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다.20) 2007년 12월 28일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서 한 말도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한 것이었다. “인수위의 활동 방향과 관련해 우리는 무엇보다 도덕적 우위를 선점해야 한다. 당선자가 말한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 원칙 속에서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정해야 한다. …… 사회적 약자와 서민을 배려하고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그 같은 정책의 중심에 바로 사람이 있는 것이다.”21) 국민을 섬기는 리더십. 참 좋은 말이다. 부디 빈말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런 말들이 자꾸 귀에 들린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압도적 지지를 보내준 국민을 섬기는 낮은 자세로 국정을 이끌겠다고 약속을 했다. …… 이 당선자가 진정 낮은 자세로 국민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면, 차기 정부의 얼굴인 이 위원장의 전력에 대해 단순히 ‘이미 오래전의 일로서 역사적으로 정리되었다’는 소감 표명은 맞지 않다. 오히려 유감 표명, 나아가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일이다. …… 나는 이명박 당선자의 첫 인사를 무조건 비난하고 반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제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의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거듭나야 할 이명박 당선자의 성공을 위해 충언으로 받아들여지길 간절히 바란다. 이제 이명박 정권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경제 활력과 국민 모두의 성공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왜 이명박 당선자가 말한 ‘국민을 섬기는 자세’와 이경숙 위원장이 말한 그 자세가 똑같은 의미로 진실하게 다가오지 않는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22) [각주] 1) 이유주현, 「인수위원장 이경숙 총장 임명」, 『한겨레』, 2007년 12월 26일, 1면. 2) 황준범, 「“국보위 활동 지난일” “전력 문제 있다” 이 당선자-이재오 2시간 논쟁 ‘진통’」, 『한겨레』, 2007년 12월 26일, 3면. 3) 황준범, 「인수위원장 발탁으로 본 ‘이 당선자 인사 스타일’」, 『한겨레』, 2007년 12월 26일, 1면. 4) 황준범, 「“국보위 활동 지난일” “전력 문제 있다” 이 당선자- 이재오 2시간 논쟁 ‘진통’」, 『한겨레』, 2007년 12월 26일, 3면. 5) 동정민·정기선, 「이경숙 인수위원장 일문일답 “경제-교육 살리는 밑그림 그리겠다”」, 『동아일보』, 2007년 12월 26일, 3면. 6) 정석구, 「사이비 ‘실용주의’」, 『한겨레』, 2007년 12월 28일, 34면. 7) 황준범, 「인수위원장 발탁으로 본 ‘이 당선자 인사 스타일’」, 『한겨레』, 2007년 12월 26일, 1면. 8) 김이삭, 「숙대와 이경숙 총장, 이것이 궁금하다」, 『한국일보』, 2006년 3월 3일, 25면. 9) 김무정, 「사랑해요 하나님-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국민일보』, 1999년 4월 27일, 23면. 10) 김철웅, 「여적- 국보위」, 『경향신문』, 2007년 12월 28일, 30면. 11) 김이삭, 「숙대와 이경숙 총장, 이것이 궁금하다」, 『한국일보』, 2006년 3월 3일, 25면. 12) 백원기, 「‘인사가 만사’라는데」, 『한겨레』, 2007년 12월 27일, 31면에서 재인용. 13) 안철흥, 「능력 있으면 과거는 묻지 말라고요?」, 『시사IN』, 2007년 12월 28일, 인터넷판. 14) 동정민·정기선, 「이경숙 인수위원장 일문일답 “경제-교육 살리는 밑그림 그리겠다”」, 『동아일보』, 2007년 12월 26일, 3면. 15) 백원기, 「‘인사가 만사’라는데」, 『한겨레』, 2007년 12월 27일, 31면. 16) 손호철, 「축! 신 국보위시대」, 『한국일보』, 2007년 12월 31일, 30면. 17) 전성철, 「앞서가는 CEO 이경숙 총장 “여성들이 직접 학사주체로 참여 여대 강점은 유효”」, 『한국일보』, 2005년 5월 2일, 7면. 18) 김이삭, 「4선 연임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 『한국일보』, 2006년 3월 3일, 25면. 19) 이동형, 「4선 연임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 『경향신문』, 2006년 3월 6일, 12면. 20) 이나연, 「사학100년-숙명여대 이경숙 총장이 말하는 학교 발전 청사진」, 2005년 5월 4일, 63면. 21) 박민혁, 「‘얼굴마담 되지 않겠다’ 이경숙 인수위원장 초반부터 의욕적 행보」, 『동아일보』, 2007년 12월 29일, 2면. 22) 백원기, 「‘인사가 만사’라는데」, 『한겨레』, 2007년 12월 27일, 31면. * 본문은 월간 <인물과사상> 2008년 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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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24 [12:37] ⓒ대자보 | ||||||||||||
출처 : 일상다반사 <소요유>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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